신라 얼굴무늬수막새(일명 ‘신라의 미소’),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국보 196호), 인재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겸재 정선의 ‘단발령망금강도(斷髮嶺望金剛圖)’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능호관 이인상의 ‘장백산도(長白山圖)’, 단원 김홍도의 ‘병진년(丙辰年)화첩’과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추사 김정희의 서예 ‘죽로지실(竹爐之室)’, 고람 전기의 ‘귀거래도(歸去來圖)’, 조선 백자철화 끈무늬병, 조선 백자 달항아리 등의 국보 보물부터 김환기 박수근 장욱진 이우환 백남준 김수자 이종상 김종영 서세옥 김창열 김홍주 배병우 이기봉 구본창 씨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아우르는 이 정도의 명품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매우 진귀한 일. 가야 토기부터 고려청자, 조선 백자, 조선 회화 그리고 근현대 미술의 사진 영상 조각 등 시각 미술의 시대와 장르를 모두 망라한다. 이 전시의 최고 매력이다.
내년 1월 27일까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리는 ‘한국 미술-여백의 발견’. 여백의 미학을 보여 주는 고미술 28점과 현대미술 31점을 전시한다.
한국미를 한마디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여백의 미가 한국적 미감의 하나라는 데엔 이견이 없다. 한국 미술에서 여백은 비움이면서 채움이다. 비어 있어 충만한 것이다. 그 여백은 물질을 초월하는 고결한 정신을 담고 있다.
전시는 특히 고미술과 현대미술의 여백을 비교 감상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 이 작품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황인기 씨의 ‘방(倣) 인왕제색도’를 비교해 보면 여백의 시대적 차이를 감지할 수 있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와 김수자 씨의 영상미술 ‘빨래하는 여자-인도 야무나 강가에서’를 비교해 보는 것, 15, 16세기 백자철화 끈무늬병과 김종영 씨의 철판 조각, 이우환 씨의 ‘선에서’를 비교해 보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다. 물을 바라보며 세상의 여백을 관조하는 일이, 선과 여백에서 삶의 철학을 발견하는 일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주되어 나타났는지 발견할 수 있다. 그건 행복한 경험이다.
이번 전시엔 비움의 건축으로 유명한 건축가 승효상 씨가 큐레이팅에 참여해 전시 공간을 매력적으로 꾸몄다. 승 씨는 한국 전통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경북 영주시 부석사의 공간 배치를 차용해 열린 공간과 닫힌 공간 사이를 산책하는 느낌을 주도록 전시 공간을 조성했다.
단원의 ‘병진년화첩’에 수록된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 앞에 서 보자. 요즘처럼 늦가을의 서늘한 밤풍경을 그린 작품인데, 그 숨 막히는 적요감이 시리도록 투명하다. 단원의 천재성에 탄성을 지를 수밖에…. 그리고 관람 도중 느닷없이 나타나는 추사 김정희의 염주. 그 예기치 않은 만남이 삶의 여백을 돌아보게 한다.
10, 24일 오후 2시엔 이준 리움 부관장, 건축가 승 씨, 김홍남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여백의 미학에 대해 강연한다. 02-2014-6901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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