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반쯤은 뒤덮은 텁수룩한 수염이 주인을 따라 함께 웃는다. 김태원(55) 신부. 개구쟁이 어린아이 같다. 세상 시름 떨쳐 버린 농사꾼이다.
“올해는 도토리가 풍년인데 사람들이 다 주워가. 그래서 뒷산 밤나무 수확을 안했어. 동물들한테 죄스럽잖아.”
강원 평창군 산골마을에 너와 황토집을 짓고 옻칠화에 몰두해 온 김 신부의 그림은 자신을 꼭 빼다 박았다. 단순하면서도 역동적인 인간의 모습, 해맑게 뛰어 노는 어린아이들이 그의 그림 속에 채워져 있다.
김 신부가 7∼13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갤러리 원에서 다섯 번째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김 신부가 나무, 철, 천, 한지, 가죽, 대나무, 점토, 합성수지, 동물뼈 등 9가지 재료를 이용해 그린 옻칠화 78점이 전시됐다.
옻칠은 그 유래가 기원전 3세기까지 올라가는 우리나라 전통의 칠기법이다. 옻칠화는 유화보다 더 중후한 맛이 나고 자연색을 그대로 살려 세월이 흐를수록 색감이 더욱 또렷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또 내구성이 뛰어나 한 번 그리면 1000년이 지나도 변색이 되지 않는다. 김 신부의 그림에서는 동양의 전통적인 칠기법과 서양의 화법이 만나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김 신부는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한 유학파다.
옻칠화는 보통 3가지 기법이 이용되는데 옻에서 불순물을 정제한 투명칠에 광물성 안료를 혼합해 색감을 내는 채칠(彩漆), 여러 색의 안료가루를 그림에 뿌려 고착시키는 건칠분시회(乾漆粉蒔繪), 바탕이 되는 소지(素地)에 금박을 칠로 붙인 박회(箔繪)가 그것이다. 옻칠화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나무를 소지로 할 경우 공정이 45가지나 되고 한 점을 완성하는 데 30일 정도가 걸린다. 또 철판에 옻칠을 하기 위해서는 섭씨 200도의 열이 필요한데 마땅한 가마가 없어 김 신부가 연구 끝에 직접 고안해 냈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생명’. 이전 네 차례 전시회 주제도 모두 ‘생명’이었다.
“생명만큼 소중한 것이 어디 있어.”
왜 줄곧 ‘생명’이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두엄을 이용한 자연농법으로 5500m²의 땅에 옥수수 고추 해바라기 더덕 농사를 짓는 김 신부는 잡초도 뽑지 않고 잘라 준다. 동물들이 싫어한다며 비누도 쓰지 않고, 빨래도 물빨래만 한다. 멧돼지와 고라니가 옥수수밭을 망쳐 놔도 “동물들이 주인이고 나는 손님인걸” 하며 웃어넘긴다.
김 신부는 전시회 수익금 거의 대부분을 강원도 산골의 불우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써 왔다. “누구누구 줄 것인지 다 결정해 놨어. 다른 사람 시켜서 조용하게 주고 있어.” 이 대목에서 그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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