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이 사는 집과 시나고그(유대교회)는 거의 예외 없이 약탈당했다. 유대인들은 눈에 띄는 대로 폭행을 당했다. 몇몇은 심하게 폭행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참상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대인도 있었다.
나치 대원들의 유대인에 대한 무차별 폭행과 약탈은 10일 밤까지 계속됐다. 이틀간 약 100여 명의 유대인이 숨졌고, 7500여 개의 유대인 상점이 약탈당했다. 또 1600여 개의 유대 교회가 파괴됐다. 3만여 명의 유대인들은 나치에 체포돼 집단 수용소로 보내졌다.
후에 이 사건에는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라는 이름이 붙었다.
독일어로 크리스탈나흐트는 ‘수정(水晶)의 밤’이란 뜻이다. 이틀간 나치 대원들이 부순 유대인 상점의 깨진 유리가 온 거리를 뒤덮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에서 풍기는 낭만적인 느낌과는 달리 크리스탈나흐트는 1945년 나치가 패망할 때까진 계속된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량 학살)의 전주곡이었다.
크리스탈나흐트가 벌어진 계기는 11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에른스트 폼 라스라는 나치 독일의 하급 외교관이 나치의 유대인 차별에 항의하는 17세의 폴란드계 유대인 소년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이었다.
나치의 선전장관이던 요제프 괴벨스는 이 사건을 핑계 삼아 나치대원들에게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에게 테러를 가하라”고 명령했다.
경찰과 소방대에는 절대 개입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이들의 선동에 많은 독일 시민이 가담했고, 수정의 밤은 유대인들에게 악몽의 밤이 됐다.
약탈은 이틀 만에 끝났지만 나치는 폼 라스의 죽음에 대한 대가로 유대인들에게 100억 마르크(약 4억 달러)의 변상금을 요구했다.
집단 수용소에 보내졌던 3만여 명의 유대인은 “독일을 떠나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몇 달의 집단 수용 기간 중 2000명 이상이 숨졌다.
크리스탈나흐트 이후 1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독일을 떠나 이웃 나라로 피난을 갔지만 나치는 1945년까지 유럽 전역에서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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