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키 큰 나무들과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느릿한 구름,
엉켜 있는 나무줄기와 나뭇잎들이 움직이고,
눈을 들어 그는 훨훨 날고 있는
새들의 움직임을 바라본다.
주위에선 아우성이 터지지만 그는 듣지 않는다.
분명 원망과 모욕일 테지.
그의 코치는 얼굴을 감싸안고 낙담한다.
아, 너는 끝내지 못하는구나,
너는 마무리 짓지 못하는구나’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의 단편 ‘장거리 주자 멈추어 서다’에서>》
왜 그 장거리주자는 결승선을 눈앞에 두고 멈추어 섰을까? 그는 지치지 않았다. 다리가 아픈 것도 아니다. 컨디션은 최상이었고 그를 뒤쫓는 2위 선수는 멀찌감치 뒤처져 있었다. 달리는 자세도 가볍고 경쾌했다.
그런데도 그는 결승선을 코앞에 두고 쓰러졌다. 왜 그랬을까. 그는 그냥 멈추고 싶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언덕 훈련의 환상코스 3.5km
울긋불긋, 붉으락푸르락, 노릇노릇 황홀한 늦가을. 서울 남산은 두 발 달린 짐승들의 해방구다. 걷는 사람, 달리는 사람, 낙엽 밟는 사람, 산책하는 사람, 달리다가 잠시 쉬는 사람…. 달리다가 멈추든, 멈추다가 달리든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남산의 산책코스는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의 메카. 서울 장안의 웬만한 서브스리 마스터스는 이곳에서 내공을 쌓는다. 근육을 키워 강호로 나간다.
서울시는 최근 북쪽 산책코스(케이블카 승차장∼조지훈 시비∼와룡묘∼석호정) 3.5km 구간에 육상트랙처럼 쿠션이 있는 소재를 깔았다. 산책로 한쪽 방향 4m 폭의 아스팔트를 걷어낸 것. 바닥재질은 고무 칩과 우레탄을 합성한 것이어서 무릎에 그만큼 부담이 적다.
남산 산책로는 아기자기하고 오르내리막이 있어 마스터스들에겐 환상의 코스. 언덕 훈련에 최고다. 500m마다 거리 표시가 돼 있어 기록을 체크할 수도 있다.
새벽엔 주위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잦고, 오전엔 시각장애인이나 주부들이 많이 찾는다. 직장인 마스터스들은 주로 오후 7시 이후에 몸을 푼다. 시각장애인 최영현(61) 씨는 “매일 7km씩 걷는데 당뇨병이 많이 나아졌다”고 말한다.
남궁만영(39·2시간 38분 47초) 씨는 서브스리 94회의 마스터스 지존. 그는 불암산∼수락산∼사패산∼도봉산∼북한산으로 이어지는 서울 5산 종주 최고기록(7시간 43분)을 한때 보유했을 정도로 산꾼이다. 그는 “산을 타는 내 근육의 50%는 남산을 오르내리면서 키웠다”고 말한다.
서브스리 10회 박충규(55·2시간 54분 23초) 씨는 “일주일에 하루 20km씩 남산에서 달린다. 잘 안 쓰는 무릎 옆과 안쪽 근육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끔 마니아들끼리 갖는 남산번개모임도 재미가 쏠쏠하다”고 예찬론을 편다.
서브스리 4회 정민호(38·2시간 58분 15초) 씨는 “남산코스는 마라토너에게 종합선물세트나 마찬가지다.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어 재미있다. 적어도 일주일에 이틀은(12km씩) 남산에서 뛰어야 직성이 풀린다”며 웃는다.
구자영(48·2시간 53분 11초) 잠실인터벌 교실 감독은 “서브스리를 하려면 왕복 6km코스를 23분대에는 달려야 한다”고 충고한다.
○나이도 가족도 의미 없다… 달릴땐 한식구
홍대용(1731∼1783) 백동수(1743∼1816) 박제가(1750∼1805)는 남산 밑에서 살았다. 박지원(1737∼1805) 이덕무(1741∼1793) 유득공(1749∼1807) 이서구(1754∼1825)는 종로탑골공원 백탑(원각사지 10층석탑) 부근에서 살았다. 이들은 청계천 수표다리를 건너 백탑과 남산을 오가며 우정을 다졌다.
홍대용 박지원 이서구는 사대부 양반이었지만 서자 출신 이덕무 백동수 유득공 박제가와 어울리는 데 전혀 개의치 않았다. 홍대용과 이서구는 스물세 살 차, 박지원과 박제가는 열세 살 차가 났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박제가는 말한다. “기질 다른 형제요, 한방에 살지 않는 부부라. 사람이 하루라도 벗 없으면, 좌우의 손을 잃은 듯하리.”
남산을 달리는 마스터스들은 모두가 벗이다. 나이나 기록도 큰 의미가 없다. 달릴 땐 한 식구가 된다. 그래서 근육을 키워 강호에 나갔던 사람들도 다시 남산으로 돌아온다.
낙엽이 눈처럼 날리는 남산. 또 한 해가 가고 있다. 꽃이 지기로소니, 어디 바람을 탓하랴(조지훈 ’낙화‘).
낙엽이 지기로소니, 어디 세월을 탓하랴. 코스 주변엔 조지훈 시인의 시비 ‘파초우’가 서 있다.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
▼“장딴지 보면 서브스리 압니다” 남산의 마라톤 족집게 장분난 씨▼
출발지점(0m) 남산녹색체육회관 입구에 붙어 있는 글귀다. 13m²(4평) 크기의 소박한 간이 휴게실. 간단한 음료수를 파는 곳이지만 남산 달림이들의 보금자리라 할 수 있다. 오전 6시 무렵부터 밤 12시까지 늘 붐빈다. 대부분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몸을 푼다. 소지품도 맡겨놓고, 마라톤 정보도 교환한다. 간이 웨이트트레이닝장에서 근육을 데울 수도 있다. 휴게실 벽엔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다룬 언론 화제기사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녹색체육회관을 32년 동안 지키고 있는 사람은 이상학(60)-장분난(55) 씨 부부. 장 씨는 재야 마라톤의 고수로 통한다. 그는 한눈에 그 사람의 풀코스 기록이 얼마인지 거의 정확하게 알아맞힌다.
“장딴지 색깔을 보면 대충 훈련을 얼마나 했는지 알 수 있고, 근육을 만져 보면 서브스리를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있어요. 고수들일수록 근육이 부드럽습니다.”
장 씨는 풀코스는 한 번도 달리지 않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남산코스 7km를 달린다. 그가 달리면 웬만한 마스터스들은 다 알은체를 한다. 한마디로 남산 마라톤의 대모나 마찬가지다.
녹색체육회관을 이용하는 동호회만도 20여 개나 된다. 고구려마라톤클럽, 서울마라톤클럽, 러너스클럽, 광화문마라톤클럽, 남대문마사모클럽, 팔공마라톤클럽, 100회마라톤클럽, 서울시청마라톤클럽, 발렌타인마라톤클럽, 포이즌마라톤클럽, 불자마라톤클럽, 가톨릭마라톤클럽, 영라이프마라톤클럽,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클럽….
김화성 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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