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의 역사가 곧 사상의 역사다.”
2005년 ‘고구려코드…2000년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10회에 걸쳐 연재된 내용을 더욱 확대하고 심화시킨 이 책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이는, 한국미술사에서 늘 장식적이고 주변적 존재에 불과한 무늬가 실상 한국미술사의 진정한 ‘주재자’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3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고구려 벽화에서 조선시대 목조건축의 단청에까지 끊임없이 등장하는 덩굴무늬 당초무늬 불꽃무늬 구름무늬 등이 우주의 신령한 기운(영기·靈氣)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발견이다. 많은 사람이 그 무늬들이 막연하게 기(氣)의 표현일 것으로 생각해 왔다는 점에서, 그것들에 ‘영기무늬’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과연 그렇게 대단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 대답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김춘수의 시구가 대신할 것이다.
둘째, 그 영기 표현이 추상무늬에 그치지 않고 연꽃과 용과 같은 매우 구체적 형상으로 발전했으며 다시 조각, 도자기, 건축과 같은 3차원 예술 속에서도 영기화생(靈氣化生)의 세계관으로 전승되고 있다는 통찰이다. 일본식 귀면와(鬼面瓦)로 알려진 한국 전통기와의 조각이 실은 용의 정면 얼굴을 표현한 ‘용면와(龍面瓦)’라는 깨달음이 그 부산물의 일부라면 한국 사원건축에서 지붕과 기둥을 연결하는 공포(공包)의 구조가 부처의 폭발적 영기의 표현임을 발견한 것은 그 절정이다.
셋째, 그 비밀의 열쇠가 바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숨어 있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 벽화 공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무늬의 기원을 추적하다가 추상적 형태에서 구름, 불꽃, 연꽃의 구상적 형태로 발전하고 다시 사신도(四神圖)로 압축됐음을 발견했다. 신라 불상 연구로 일가를 이룬 저자가 “한국 미술의 모태를 신라로 생각해 왔는데 그 근원적 뿌리가 고구려에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고구려 문화의 면면한 계승성을 확인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고구려코드를 통해 중국과 일본, 서역을 넘어 세계미술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영기무늬의 보편적 기원을 밝혀냄으로써 한국이 세계적 이론의 발신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내포한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미술사계의 ‘보검’ 같은 존재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과 경주박물관장을 지내며 30여 년 세월 문화재 현장에서 벼려낸 ‘단단함’과 동서양의 미술이론을 섭렵하며 갈고 닦은 ‘날카로움’을 바탕으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풍토가 강한 우리 미술사계에 칼바람을 몰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가 이번에 같이 펴낸 4번째 예술론집 ‘어느 미술사가의 편지’에서 그런 자신에 대해 오만하면서도 전혀 미워 보이지 않는 오유(傲遊)의 경지를 지향한다고 밝혔다.
이 책을 냄으로써 이제 그 오유한 ‘보검’이 수많은 이론적 비판 앞에서 스스로 얼마나 탄탄한 방패가 될 수 있는지도 보여 줘야 할 차례가 됐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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