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정호승/‘거위’

  • 입력 2007년 11월 23일 03시 04분


《개나리 핀 국도에 차들이 달린다

할머니 한 분이 아까부터 허리를 구부리고

길을 건너지 못하고 서 있다

그때

할머니 뒤에 서서 개나리를 쳐다보고 있던 흰

거위 떼들이

뒤뚱뒤뚱 떼 지어 길을 건넌다

순간

있는 힘을 다해 달려오던 차들이 놀라 멈춰 선다

버스가 멈춰서고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이 멈춰 선다

거위들은 경적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할머니가 거위 뒤를 따라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길을 건넌다

시집 ‘포옹’(창비) 중에서》

거위 떼들이 먼저 건너는 것이 맞다. 국도가 생기기 전, 저 아스팔트길은 무수한 거위와 오리들이 네 활개 치며 건너던 길이다. 개구리가 뛰고 메뚜기가 날던 길이다. 국도를 만들 때에 그곳에 살던 동물 주민들에게 허락을 받지 않은 게 분명하다. 무례한 속도로 휙휙 달려오는 버스와 트럭보다 뒤뚱거리는 거위들이 당연히 먼저다. 지팡이를 짚고 선 할머니가 그 다음에 길을 건너는 것도 당연하다. 당연한 순서대로 당연하게 건너가셨다.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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