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헤맨다 법이 임자 정해버린 거리들을/그 근처로는 법이 임자 정해버린 템스 강이 흐르고/만나는 얼굴 얼굴마다에서 나는 본다/나약함의 표지, 슬픔의 자국을.’(윌리엄 블레이크, ‘런던’ 중에서) 군주제를 반대하는 공화주의자들의 움직임이 거세던 18세기 영국. 때마침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 일렁이는 혁명의 불꽃에 런던은 뒤숭숭했다.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사진)의 시 ‘런던’은 혼란스러운 도시의 풍경을 대단히 예리하게, 대단히 문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
블레이크에 매료된 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45)는 이 뛰어난 시인의 삶과 시대를 복원하기로 한다. 일찍이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화가 얀 베르메르와 17세기 네덜란드를 되살려낸 슈발리에로선, 장기를 발휘할 수 있는 소재였다.
1729년 3월 런던. 목수인 토머스 캘러웨이 가족이 런던 램버스로 이사 온다. 아버지가 서커스단의 무대 소품을 만들게 되면서다. 목수의 아들 젬은, 되바라졌지만 활기차고 영리한 소녀 매기 버터필드와 가까워지고, 두 사람은 이웃집 남자 블레이크와 왕래하게 된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는 빨간 모자를 쓰고 다니고 정원에서 부인과 알몸으로 ‘실낙원’을 읽는 괴상한 사내다. 블레이크는 소년 소녀에게 자신이 쓴 시를 읽어 주고 직접 그린 그림을 보여 주며, 때로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젬의 누나 메이지는 순진한 시골 소녀이지만 서커스단장의 아들인 바람둥이 존과 사랑에 빠지면서 예정된 상처의 길로 들어선다. 군주제 지지자들이 급진적인 공화주의자인 블레이크의 집을 습격하면서 소년 소녀들의 운명은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렇지만 역시 이 소설의 매력은 뛰어난 묘사다. 연애와 범죄가 함께 벌어지는 골목, 유쾌한 허풍이 난무하는 술집, 우아하게 차려 입은 귀부인이 있는 템스 강 건너편 소호 거리, 창녀와 부랑자들로 가득한 세인트 자일스 빈민촌, 여기에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대에 서민들에게 환상적인 오락거리가 된 화려한 서커스 장면들….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는 듯한 풍경을 읽다 보면 “슈발리에는 생생하고 사실적인 이미지를 그려내는 데 천부적”(타임스)이라는 평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원제 ‘Burning Bright’(2007년)는 블레이크의 시 ‘호랑이’의 한 구절. 블레이크의 아름다운 시편도 소설 곳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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