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권력의 관계는 늘 흥미로운 소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숨겨진 책 ‘시학 2권’에 대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시경’ 빈풍 편에 등장하는 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이이화의 ‘영원한 제국’을 떠올려 보라. 대통령이 휴가지에서 무슨 책을 읽었다는 것이 화제가 되고 최고경영자(CEO)의 애독서 리스트가 기사가 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사 인물이야기’의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기록에서 고려 광종부터 조선 고종까지 주요 임금의 애독서를 찾아내고 당대 정치의 함수관계를 풀어냈다.
고려 광종이 애독한 책이 당 태종 시대 통치를 기록한 ‘정관정요’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광종은 고려 태조 왕건의 스물다섯 왕자 중 하나로 배다른 형(혜종)은 물론 친형(정종)까지 제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당 태종은 당 고조의 스물두 명의 아들 중 하나였으나 역시 친형과 친아우를 죽이고 아버지까지 유폐시킨 뒤 왕위에 올랐다. ‘나보다 더한 당 태종도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는데…’라는 오기를 느낄 수 있다.
광종을 닮은 조선 태종은 어떨까. 이복동생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뺏긴 뒤 울분에 잠긴 그에게 조준은 ‘대학연의’를 선물하며 “이 책을 읽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뼈 있는 말을 전한다. 대학연의는 남송 때 주자학파의 일원이었던 진덕수가 경서(經書)인 ‘대학’과 사서(史書)인 ‘자치통감강목’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제왕학의 교본으로 삼은 책이다. 한마디로 군주가 도덕수양을 닦으면 태평성대가 절로 열린다는‘무위이화(無爲而化)’의 경지를 찬미한 내용이다. 따라서 이후 무력으로 이룬 태종의 정권 탈환 과정과는 거리가 있는 책이다. 그러나 태종은 즉위 초부터 이 책을 끼고 사는 것을 만방에 과시한다. 자신의 칼에 묻은 피를 닦아 내는 수건으로 사용한 것이다.
조선시대 제왕의 애독서는 이 같은 이중성을 지닌 경우가 많다. 성종이 ‘소학’을 애독한 것은 한편으로 신진 사대부층인 사림세력을 포섭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폐비 윤씨 문제에 대한 윤리적 방패막이로 사용한 것이라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전자는 사림의 종정인 김종직이 ‘소학’을 국가적 필독서로 삼을 것을 주창한 것을 말한다. 후자는 성종이 성인이 된 뒤 소학의 내용을 부쩍 강조한 것이 그가 폐비 문제를 들고 나온 집권 8년 이후라는 점에서 그렇다. 수신제가(修身齊家)를 강조하는 대학의 논리에 입각하면 가장인 성종의 부덕(不德)의 소치가 될 일을, 교화(敎化)를 강조하는 소학의 논리에 따라 부인 윤씨의 부덕(婦德)의 미비로 몰고 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후 조선 국왕들의 애독서는 철학서인 ‘경서’로 흐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는 신권(臣權)이 강화되면서 싫든 좋든 국왕의 내면적 덕성을 강조하는 책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효종이 ‘심경’을 경연과목으로 처음 채택한 것이나 영조가 ‘예기’를 읽으면서 연출된 눈물을 흘린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외는 무려 249권에 이르는 대하역사서 ‘자치통감’을 여러 차례 통독한 세종과 말년에 점술서 ‘주역’에 몰두한 선조 정도였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탐닉한 두 군주의 이유는 달랐다. 세종이 철학에 심취한 신하들의 좁은 식견을 뛰어넘기 위해 역사에서 답을 구했다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던 난세를 살았던 선조는 현실도피의 심정으로 점술서에 심취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이 책에서 다룬 책 중에 ‘제왕의 책’에 부합하는 서적은 드물다. 차라리 ‘한비자’나 ‘관자’를 읽었다면 어땠을까. ‘무위이화’의 경전으로 읽히던 ‘서경’에서 군주의 적극적 역할을 읽어낸 정조의 탁견이 새삼 돋보이는 이유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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