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 대연습실. 뮤지컬 ‘러브’(연출 윤호진)의 오디션장에는 50∼70대의 ‘어르신 오디션’이 열렸다. 어르신 배우 지망생들의 대사와 연기, 노래 하나하나에 오디션 장은 내내 웃음꽃이 피었다. 몸을 아끼지 않는 이들의 열정에 장내는 후끈 달아올랐고, 뮤지컬이 더는 20, 30대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 줬다.
내년 2월 1∼2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라이선스로 막을 올리는 뮤지컬 ‘러브’는 실버타운에서 벌어지는 황혼의 사랑을 코믹하게 그린 아이슬란드 뮤지컬. 인생을 반추하게 하는 잔잔한 대사와 비틀스의 ‘렛 잇 비’, 수전 잭슨의 ‘에버그린’과 같은 추억의 팝송이 삽입돼 있다. 15명 정도의 일반 출연자 모집 공고에 50∼70대 어르신들이 147명(여자 98명, 남자 49명)이나 몰려들었다.
이날 오디션에서 부동산 컨설팅회사에서 근무한다는 배선희(52·여) 씨는 소녀댄스 그룹 ‘바나나걸’의 ‘엉덩이를 흔들어봐’ 춤으로 오디션 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배 씨는 사내 장기자랑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던 실력파.
지원자 중에는 정년퇴직한 교사와 경찰관, 아버지 합창단원, 동화 구연가, 전직 공무원, 외국인회사 전직 최고경영자, 예편한 해군대령, 주부노래자랑 우승자, 베트남전 참전 맹호부대 군악대 출신 등 경력이 다채로웠다. 특기 란에는 ‘춤을 빨리 배울 수 있다’는 등 이색적인 내용도 많았다.
오디션을 위해 제주도에서 올라온 시인 채바다(63) 씨는 1996, 1997년과 2001년 3차례에 걸쳐 뗏목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며 고대 해양로를 연구해 온 탐험가. 그는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라는 ‘현해탄 연작시’를 쓰기도 했다. 채 씨는 “그동안 대한해협에 대해 연구하고 탐험해 왔던 것들을 뮤지컬로 표현해 보고 싶어서 이번 기회에 참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구에서 재테크 강사로 활동하는 정순례(56) 씨는 “돈만 준비됐다고 은퇴생활을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며 “실버세대의 삶과 사랑을 그린 뮤지컬인 만큼 내가 하는 일과도 연결될 것 같다”고 말했다.
오디션 장에는 주역급인 박근형 백일섭 전양자 이주실 황범식 씨 등 중견 탤런트들도 일반 출연자와 함께 연기와 노래 오디션을 받았다. 백일섭 씨는 “배우들은 평생 가공해 온 연기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데, 저분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더욱 리얼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분들이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큰 감동을 줄 것 같다”고 말했다.
제작사인 에이콤의 윤호진 대표는 “오디션을 해 보니 저런 끼를 갖고 있는 분들이 어떻게 그냥 사셨는지 모를 정도였다”며 “요즘의 어르신들은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문화예술과 자기표현 욕구가 상상할 수 없이 높은데 그동안 사회가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