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따라잡기]힐러리책이 뜨는 이유

  • 입력 2007년 12월 8일 03시 01분


얼마 전 초등학교 3학년인 조카와 함께 TV를 봤다. ‘원더걸스’를 넋 놓고 바라보니 조카가 묻는다. “삼촌은 누가 제일 좋아?” “음…, 선예 같은 여자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 요즘 한자를 배운다는 조카의 대꾸.

“그건 삼촌 나이에 ‘시의 적절’하지 않아. 선예 같은 딸을 갖고 싶다고 해야지.”

시의성은 모든 일에서 중요한 변수다. 마케팅에선 생명이다. 출판도 사고파는 일이다. 밸런타인데이에는 달콤한 사랑 얘기, 광복절엔 일제강점기나 해방 관련 책이 쏟아진다. 타이밍에 맞춘 기획에 독자도 흥미를 가진다.

그런데 요즘 이상한 게 있다. 이쯤이면 쏟아질 만한 책들이 안 보인다. 대선이 열흘 남짓 남았는데 정치 관련 서적이 보이지 않는다. “요즘은 출판계 술자리를 가도 대선 관련 책 이야기를 하는 이가 거의 없다.”(신민식 위즈덤하우스 이사)

인터넷서점 ‘Yes24’의 유성식 본부장에게도 물어봤다. “오히려 요즘은 정치 관련 테마는 숨깁니다. 예전에 정치인 한 명의 책을 소개한 적 있어요. ‘정치적 의도가 뭐냐’며 난리가 났습니다. 대선은 더 예민하죠. 민감하니 피하는 겁니다.”

하지만 정치인 혐오가 그대로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한 명의 금발 정치인은 유독 예외다. 힐러리 클린턴 미 상원의원.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아내인 그녀만큼은 요즘 국내 출판계에서 자주 등장한다.

힐러리를 다룬 최근 책들을 보자. 10월경 연달아 나온 책들이 다 성공했다. ‘여자라면 힐러리처럼’(다산북스)은 5만 부 이상 팔렸다. 평전 ‘힐러리의 삶’(현문미디어)은 768쪽에 이르는 두께에도 3만 부가 넘었다.

이렇다 보니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졌다. ‘나는 이기기 위해 도전한다’(리더스북)는 힐러리 사진과 이름이 커다랗게 박혔다. 얼핏 봐선 힐러리 자서전이다. 하지만 내용은 다르다. 힐러리와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을 ‘똑같이’ 다룬 책이다. 지난달 나온 이 책도 꽤 잘 나간다.

힐러리 책 바람은 외국 정치인들에 대한 관심 덕분도 아니다. 7월에 나온 ‘담대한 희망’과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랜덤하우스). 최근 미국에서 촉망받는 버락 오바마 미 상원의원의 자서전과 연설집이다. 술술 읽히고 내용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하지만 판매 성적은 그저 그렇다. 유 본부장에게 다시 물었다. “힐러리는 그 자체로 브랜드예요. 패리스 힐턴처럼 일종의 팬시상품이죠. 어여쁘고 능력 있는 여성상으로 받아들여진 거죠.”

여기에 더욱 중요한 요인 하나 더. ‘남의 나라’ 정치인이다. 딱히 우리네 삶에 영향도 없다. 그녀의 장점만 이야기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지금 대선 후보를 좋게만 말했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는 것과 딴판이다.

우리에게 힐러리는 미국 대선의 유력 후보가 아니라 ‘오프라 윈프리’ 같은 존재인 셈이다. 대학 후배에게 더 물어봤다. “미국 정치인 중 누구를 아니?” “힐러리! 멋지잖아(어쩌고저쩌고).” “다른 정치인은?” “음…, 몰라. 왜 갑자기 재미없는 정치 얘기야?”

거참, ‘시의 적절’한 구분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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