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화의 별도소설 발견
‘필사본’보다 앞서 씌어
용어-일부내용 거의 흡사
두책 모두 가공인물 등장”
《신라 화랑의 남녀 관계나 근친혼 등을 담아 진위를 둘러싸고 역사학계를 뜨겁게 달궈온 ‘필사본 화랑세기’가 가짜임을 보여 주는 증거가 나왔다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된다. ‘화랑세기’는 신라의 문장가 김대문이 7세기 말 여러 화랑의 생애를 쓴 전기로 원본은 발견되지 않은 채 한학자 박창화(1889∼1962)의 필사본이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인정받아 왔으나 학계에서는 필사본이 가짜라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
동국대 겸임교수인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11일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남당 박창화 선생 유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필사본 화랑세기’가 만들어진 시기(1930, 40년대)보다 앞선 1930년에 ‘필사본 화랑세기’의 내용과 흡사한 45쪽의 소설책(가칭 ‘소설 화랑세기’)과 이에 수록된 향가 1수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박 연구관은 “‘필사본 화랑세기’에 쓰인 용어가 ‘소설 화랑세기’에서 같은 뜻으로 사용됐고 비슷한 내용도 다수 발견됐다”며 “이에 비춰보면 ‘필사본 화랑세기’는 ‘소설 화랑세기’ 처럼 화랑을 다룬 박창화의 역사소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오늘날로 치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팩션(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사실을 창조한 문학예술)의 수작인 셈이다. 박창화는 생전에 ‘화랑세기’를 필사했다는 점을 밝히지 않았으나 그의 유족이 1989년과 1995년 2차례에 걸쳐 ‘필사본 화랑세기’를 공개했다. 이후 진위 논란이 이어졌으며 학계 일부에서는 ‘화랑세기’를 사료로 인용하고 있을 정도다.
박 연구관이 주목하는 것은 ‘소설 화랑세기’에 쓰인 용어와 내용 일부가 ‘필사본 화랑세기’와 거의 같다는 점이다. ‘가야파(加耶派)’ ‘진골파(眞骨派)’ ‘국선(國仙)’ 등 수많은 용어와 뜻이 ‘화랑세기’와 같으며 신라 국왕을 ‘제(帝)’로 표현한 점도 같다.
박 연구관은 특히 ‘소설 화랑세기’와 ‘필사본 화랑세기’에 모두 나오는 ‘김흠돌의 난’이 ‘필사본 화랑세기’가 역사소설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라고 강조했다. ‘소설 화랑세기’에는 배장공이 신문왕(?∼692) 때 일어난 김흠돌의 난을 진압했다고 기록돼 있으며 배장공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오지 않고 박창화가 만든 화랑 계보도에만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김흠돌의 난을 평정한 주인공이 김대문의 아버지인 오기공으로 바뀐다. 박 연구관은 “오기공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한 차례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가공의 인물로 보인다”며 “소설이 ‘필사본 전기’로 둔갑하면서 역사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저자(김대문)의 아버지를 등장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짜라고 주장해 온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것은 박창화의 여러 소설 중 하나일 뿐”이라며 “‘화랑세기’ 원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상상력의 산물일지 모르지만 이를 근거로 화랑세기가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해 진위 논란이 다시 학계를 달굴 것으로 보인다.
박 연구관은 13일 오후 5시 동국대 문화관에서 열리는 동국사학회 학술발표회에서 ‘소설 화랑세기’와 ‘필사본 화랑세기’를 비교하는 ‘신발견 박창화 화랑세기 잔본과 향가 1수’를 발표한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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