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청소년 심리]‘트레인스포팅’의 자아정체감 혼란

  • 입력 2007년 12월 14일 03시 02분


부모에게 실망한 렌턴, 마약의 늪서 허우적

“난 어디에도 끼지 못한다. 난 훼방꾼일 뿐이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뒷골목에 사는 렌턴과 그의 친구들은 아무 희망도 없이 늘 마약에 취해 살아간다. 렌턴은 마약을 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하지만 심하게 좌절한다. 그는 “삶이 완전히 끝장날 때까지 망가지는 거다”라며 모든 고통스러운 일을 잊게 해 주는 마약의 늪으로 다시 빠져 들게 된다.

렌턴은 부모에 의해 침실에 감금된다. 그는 어른들이 도박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실망스러운 부모들의 삶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한다. 마약을 끊고 런던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지만 친구들이 다시 찾아오면서 렌턴은 다시 일탈적인 삶으로 되돌아간다. 친구들과 마약을 팔아 큰 돈을 번 렌턴은 가슴 한 구석에서 공허함을 느낀다. 평범함에서 비켜간 자신의 삶에 대한 슬픔에 직면한 렌턴은 친구들이 잠든 사이 돈 가방을 훔쳐서 거리를 정신없이 뛰어가면서 중얼거린다. “나도 당신처럼 살 것이다.”

영화 ‘트레인스포팅’은 달려오는 기차처럼 거침없이 질주하고, 공허한 마음을 메우기 위해 마약을 하는 비행청소년들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청소년기의 중요한 발달 과업 가운데 하나는 자아정체감(identity)을 확립하는 것이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내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은 무엇인가’ 등에 대해 건강한 방식으로 자아정체감을 형성하지 못하면 심한 심리적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인생을 선택하라, 직업을 선택하라. 그런데 내가 왜 이런 것들을 선택해야 하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는 렌턴의 말처럼.

자아정체감 혼란을 경험하는 청소년들은 즉각적인 쾌락과 욕구 만족을 추구하는 행동을 보이고, 불안이나 우울감을 경험하며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약물이나 알코올에 빠져 들기 쉽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 인터넷 중독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정체감 혼란을 경험하는 청소년들은 실제 현실에서는 성취하지 못하는 일을 가상공간에서 충족시키고자 하며, 채팅이나 인터넷 게임 등을 통해 내적인 욕구나 공격성을 과감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현재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가 없다고 느낄 때 청소년들은 무언가에 몰두하게 된다. 술이나 쇼핑에 몰두하기도 하고 비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인터넷에 몰두하며 현실에서 느끼는 좌절감이나 우울감으로부터 도피하곤 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대단한 성취를 이루기를 바라지만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그들이 돌아갈 수 있는 따듯한 가정과 일상적인 행복이다. “당신처럼 살 것이다”는 렌턴의 말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 속 외침이 아닐까.

신민섭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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