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종교와 의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졌지만 회화에선 그 지위가 사뭇 초라했다. 16세기 이래 예술이론가와 학자들은 음식을 다룬 정물화를 예술적 위계의 맨 아래에 놓았다. 그러나 위대한 문학 작품이나 음악 무용 영화에서 음식을 찬미한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
음식은 위대하다. 사람을 살린다. 하지만 때로 인간은 음식을 평범하고 진부하게 인식한다. 낯익은 탓에 “특별한 고려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를 두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이 낯익음의 경계에 주목한다. 사업을 하거나 연애를 하거나 행사나 의식을 치를 때 식사가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하는지 살핀다. 미국 위스콘신 밀워키대의 예술사 교수답게 미술을 주제로. 그림으로 시대의 반영을 읽는다.
안니발레 카라치의 ‘푸줏간’을 들여다보자. 널린 고기와 분주한 상인, 흥정하는 손님의 모습. 16세기 풍요로웠던 이탈리아 사회의 단면이 드러난다.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그린 ‘과일 판매대’의 정갈함은 19세기 발현하는 식품의 포장과 유통의 시초를 보여 준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주방 스토브’나 앤디 워홀의 ‘200개의 수프 통조림’은 어떤가. 현대 산업 사회의 식품 대량 마케팅이 작품 속에 녹아 있다.
저자는 단순히 그림 설명에 멈추지 않는다. 숨겨진 암호를 푼다. 작품 속 잔치와 식기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파헤친다. 중세시대, 포크 없는 식탁은 예의에 신경 쓸 겨를 없는 계급성이 묻어난다. 17세기 사탕은 부의 상징이었고 19세기 순무는 가난의 표상이었다.
“음식 그림은 단순히 식생활의 변화만 반영된 게 아니다. 자아와 우주의 전반적인 이해에 관한 세계관을 표현하는 완벽한 수단이다. 음식 그림은 우리가 다뤄야 하는 인간 생활의 기본적인 재료와 일상적인 경험 세계를 묘사한다.”
‘그림으로 본…’은 제목 그대로 예술사(史)보단 문화사에 치중한다. 회화가 그려진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나 생활, 성 의식 등이 관건이다. 딱히 미술적 기법이나 구도, 유파는 몰라도 상관없다. 마찬가지로 거창한 ‘자아와 우주의 전반적인 이해’도 필요 없다. 다만 읽은 뒤 밀려오는 허기는 어찌할까. 이 ‘낯익은’ 위대(胃大)함은 어떻게 할까.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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