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8년 대입 예비고사 첫 시행

  • 입력 2007년 12월 19일 03시 03분


오전 9시 전국 84개 고사장의 교문이 일제히 닫혔다. 학교마다 경찰이 파견돼 문제지 유출 등을 감시했다. 60문항짜리 국어시험을 시작으로 오후 4시 40분까지 객관식 180개 문제가 쏟아졌다. “어렵진 않지만 문항 수가 많아 시간이 부족했다”고 수험생들은 입을 모았다.

1968년 오늘, 대학입학 예비고사가 처음 실시됐다. 대학별 입학고사가 입시 위주의 교육을 부채질하고 정원 관리의 문란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늘자 당시 문교부는 국가가 주관하는 예비고사로 1차 선발 인원을 거른 뒤 대학에서 국어 영어 수학 위주로 본고사를 별도로 치르는 방식을 도입했다.

예비고사 첫해 총응시자는 11만2000여 명. 이 가운데 절반을 조금 넘는 6만1000명가량이 시험을 통과해 본고사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커트라인은 360점 만점에 152점.

예비고사가 실시되면서 전국 수석 합격자가 신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그해 수석은 311점을 맞은 경기고 이윤섭 군과 최왕욱 군이 차지했다. 여자 수석은 291점을 받은 숙명여고 서은주 양이었다. 학교별 합격자는 대전고 전주고 중동고 경기고 이화여고 순으로 많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수석 합격자들의 변(辯)은 비슷했다. 이 군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집에서 혼자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고 하루 7∼8시간씩 충분한 수면을 취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시작된 예비고사 체제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고액 과외가 성행하고 재수생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결국 1980년 신군부는 대학입학학력고사와 내신을 결합한 ‘7·30 교육개혁’ 조치를 내놓았다. 고교 교육 정상화와 과외 열풍 해소가 명분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단순암기식 교육을 유도한다는 비판과 함께 권력층 자녀들의 부정입학 스캔들까지 발생해 199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대체됐다.

제17대 대통령선거 후보들은 너나없이 교육 개혁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어설픈 교육정책이 고3 교실을 시험이 아닌 실험으로 몰아넣은 사례가 광복 이후 16차례나 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후보들의 공약을 보는 학부모와 학생들은 여전히 불안하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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