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 연극(演劇)이
100년을 맞는 해.
1908년 11월 15일 원각사에서
최초의 창극 형태 본격 신연극
‘은세계’가 막을 올린 뒤 지금까지 한국 연극은 100년의 길을
걸어왔다. ‘연극쟁이’로 사는 것이 쉽고 편했던 적은 없었으나
요즘 연극인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그 어느 때보다 춥다.
지난해 ‘열하일기만보’로
본보가 주최하는 동아연극상
대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손진책(62) 극단 미추 대표와
젊은 연출가 그룹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장유정(32) 연출가가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나
새로운 100년을 시작할
한국 연극의 오늘과 내일을
이야기했다.》
▽장=선생님, 동아연극상 수상 축하드립니다. 제가 열 살 때 미추가 창단됐던데. 어릴 때 엄마한테 야단맞으며 이불 속에서 몰래 TV로 마당놀이를 보곤 했는데 연극을 열심히 하다 보니 이렇게 선생님과 만나 대담을 하는 영광도 누리게 되네요.
▽손=난 (장유정이) 이렇게 크도록 뭘 했는지….(웃음)
▽손=프로듀서 시스템이 좋다, 나쁘다를 얘기하기 전에 극단을 운영하는 것에 대한 책임과 어려움 때문에 다들 극단 운영을 기피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연극 이념을 같이 하고 표현 방식으로 공유하는 동료가 없으면 연극 실험은 가능하지가 않거든. 연극 한 편 올릴 때마다 적층되는 게 있어야 하는데 프로듀서 시스템은 쉽고 편할지는 몰라도 연극 한 편 만들고 헤어지면 적층되는 힘이 없어서 발전이 힘든 측면이 있어요.
▽장=시대가 변하면서 이젠 비판성보다 솔직함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20, 30대는 어려운 얘기보다는 내가 알고 있는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간 수준의 얘기를 원하는 것 같아요. ‘내 이야기’나 ‘내 이웃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 같고요.
▽손=연극을 주도하는 것은 대극장 등에서 하는 ‘큰 연극’인데 요즘 연극은 너무 왜소해지고 자잘해졌어요. 연극이 작아지면 소재와 주제도 자잘해지고 감각으로만 흐르게 되죠. 물론 큰 무대를 감당할 역량이 되는 사람도 별로 없고. 작은 오두막만 짓다가 갑자기 큰 빌딩을 지을 수 있나. 소극장 연극을 만드는 게 더 쉽고 아기자기한 재미도 있지만 소극장 연극만 넘쳐나는 것도 문제죠. 일본은 100석 이하의 소극장 연극은 연극상 심사에도 포함시키지 않아요.
▽장=요즘 연극이 보수적 혹은 너무 인문학적이지 않느냐는 지적도 받는 것 같습니다. 연극하는 사람끼리만 공유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점점 관객이 없어지는데 어떻게 하면 관객과 함께 가는 건지도 고민됩니다.
▽손=구세대여서 그런지 몰라도 연극의 사회적인 효용성이 내 연극의 기본이에요. 물론 연극이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하죠. 연극이 강당에서 강연하는 것과 같을 순 없으니까. 하지만 연극은 사회를 보는 내시경이라고 봐요. 사회를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 좋은 예술 작품은 명약(名藥) 구실을 해야 하거든. 좋은 연극이 마약하고 똑같은 기능을 해서는 안 되지 않겠어요.
▽장=베나지르 부토 암살이 1면에 보도된 날 저녁 때 젊은 연극인들이 모인 자리에 갔는데 하나같이 부토가 죽었느냐고 깜짝 놀라더라고요. 전 아침마다 2시간씩 신문 2개를 꼼꼼히 읽고 선거일에도 꼬박꼬박 투표하거든요. 주변의 젊은 연극인들을 보면 선거에 관심도 없더라고요. 연극인이 그렇게 현실에 회의적인 모습을 볼 때면 가끔 화도 납니다.(웃음)
▽손=동감이에요. 요즘 많은 배우가 신문을 잘 안 읽어요. 근데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오늘’을 못 읽으면서 얘기할 수 있느냔 말이죠. 어쩌면 그런 점이 연극이 제대로 서야 할 자리를 모르게 된 게 아닐까 싶고. ‘오늘, 여기’를 모른다는 건 왜 연극을 하느냐를 놓치는 것과 같다고 봐요.
▽장=일자리가 없다지만 사실 일자리가 없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일하고 싶은 일자리가 없는 것처럼 편수로만 따지면 연극이 너무나 많이 공연되고 있는데 관객 관점에서는 볼만한 연극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연극의 정신은 변하지 않더라도 연극 형태는 좀 더 다양화되고 새로워져야 할 것 같은데.
▽손=연극 100년을 볼 때 우리 연극의 발전 속도가 더딘 감이 있습니다. 새로움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런 안목이나 식견이 없는 것 같아요. 외국에 가 보면 전시나 무용 혹은 다원예술이 엄청나게 빨리 발전하고 있어요. 반면 요즘 우리 연극들은 시류에 편승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 현대 예술 흐름에서 가장 늦게 발전하고 있어요. 모순이죠.
▽장=젊은 예술가로서 저는 열정과 의욕은 넘치지만 선생님처럼 깊고 넓게 가야 한다는 마음에 조급함도 생깁니다.
▽손=절대 조급해할 필요가 없어요. 내게는 인생을 경험한 장점이 있듯 젊은 친구들에게는 그걸 경험하지 않은 장점이 있는 거니까. 어쩌면 깊이는 젊음이라는 덕목을 버린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건지도 몰라요.
▽장=연극 100년이지만 앞으로 100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연극 교육 같습니다. 연극은 한 번 본 사람이 다시 보게 되잖아요. 저는 전남 여수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지금 연극을 하는 것도 초등학교 때 우연히 본 연극 때문이었거든요. 어린이 연극이 그래서 중요한 것 같고요.
▽손=민주시민을 만드는 교육이란 측면에서도 연극만 한 게 없어요. 이해와 설득으로 같이 만들어 가야 하는 거니까.
▽손=연극 100년을 보았을 때 나는 전성기가 1950년대에서 1960년대라고 봐요. 오늘날 연극하는 게 쉽진 않지만 전 연극의 미래를 절망적으로 보지 않아요. 매스 사회에서는 모든 게 카피(복제)되지만 공연만큼은 절대 복제가 안 되잖아요. 사람의 땀이 느껴지는 아날로그 예술이죠. 그런 점에서 연극(공연)은 가장 오래된 형태의 예술이자 가장 오래 살아남을 형태의 예술이기도 해요. 한때 나이 든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창극의 맥이 끊길 거라고 다들 우려했지만 전혀 아니잖아요. 요즘 ‘목 좋은’ 젊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연극도 장유정 연출가처럼 젊고 재능 있는 사람이 많이 나오고 있으니 앞으로도 잘될 거라고 믿습니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 손진책
△1947년 11월 18일생 △1986년∼ 극단 ‘미추’ 창단 대표 △1987년 백상예술대상 연출상 △2004년 동아연극상 작품상(‘허삼관 매혈기’) △2005년 제1회 허규예술상 △2007년 제44회 동아연극상 연출상(‘열하일기만보’)
○ 장유정
△1976년 12월 14일생 △2004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출과 졸업 △2006년 제12회 한국뮤지컬대상 작가상, 최고작품상(‘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2007년 제1회 더 뮤지컬 어워즈 작사상, 극본상(‘김종욱찾기’)
■ 한국 최초 신연극 ‘은세계’
“한국 최초의 본격 신연극”(서연호 이상우 저 ‘한국 연극 100년’)으로 꼽히는 ‘은세계’는 1908년 11월 15일 원각사에서 처음 막을 올렸다. 12월 초까지 보름 넘게 공연됐으나 언제 막을 내렸는지는 기록이 없다.
‘은세계’는 원주감사의 폭정을 창극으로 꾸민 것으로 양민 한 사람이 억울하게 맞아 죽은 일을 다뤘다.
현실성이 강하고 당시 사회 상황과 호응을 이뤘다는 점에서 신연극의 효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은세계’는 창극 양식으로 공연됐는데 당시 주연은 명창 임방울의 외삼촌이자 당대 인기를 끌던 명창 김창환(1854∼1927)이 맡았다.
원각사의 후신인 정동극장은 한국 연극 100년을 기념해 올해 10월 정동극장에서 ‘은세계’를 공연으로 되살린다.
배삼식 작가가 극본을 쓰고 손진책 극단 미추 대표가 연출을 맡는다. 손 대표는 “이인직의 소설 중 친일 내용이 있는 후반부는 바꾸고 100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구성으로 각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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