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꽃과 나무 곁에 두고 늘 푸르게 ‘살어리랏다’

  • 입력 2008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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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답게 을씨년스러웠다. 부부는 집 앞까지 나와 손님을 맞았다. 현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안주인은 1m 맞은편에 있는 유리문을 열더니 다시 바깥으로 안내했다.

‘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머리에 맴도는 순간 눈에 새 세상이 들어왔다.

봄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탁자와 화분 거치대 위에는 분홍과 주황, 흰색의 시클라멘과 노란색 칼란코에를 품은 화분이 즐비했다. 물이 가득 담긴 수반에선 수생식물들이 수를 놓고 있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화단에는 10m 높이의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10여 평 되는 공간의 절반쯤은 나무로 만든 마루가 깔려 있었고, 나머지는 흙이 가득한 화단이었다.

경기 광주시 오포읍 이유원(53) 정숙은(48) 씨 부부는 집에 이런 ‘비밀 정원’을 갖고 있다.

이 씨 부부는 ‘ㄷ’자 모양으로 지어진 집의 오목하게 들어간 공간을 정원으로 꾸몄다.

온도 유지를 위해 반투명 재질의 플라스틱으로 지붕을 얹어 새 공간을 만들었다.

이른바 ‘선룸’이다. 부부는 이곳에서 화초만 가꾸는 게 아니라 식사를 하고 책을 읽으며 노트북PC를 켜놓고 업무를 처리하기도 한다.

새해가 되었지만 추운 날씨에 움츠려들기 쉬운 겨울, 식물의 싱그러움을 즐기는 집들을 찾아 떠났다. 사람은 ‘식물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유전암호가 각자의 몸속에 들어있음을 일상에서 느끼곤 한다. 많은 이들이 네모난 아파트에 살면서도 전원생활을 꿈꾸고, 화분 한두 개라도 집안에 두려고 하지 않는가.》


촬영: 박영대 기자

한겨울 집안에 정원 꾸며놓고 사는 멋쟁이들

○ 생활의 중심

이 씨 부부는 경기 성남시 분당신도시와 광주시 오포읍의 경계에 산다. 분당에서 살다가 8년 전 전원생활을 하기 위해 이사했다. 재작년 겨울 실내정원을 만든 뒤 전원생활은 한 단계 더 진화했다.

일요일 아침이면 가족이 모여 정원의 식탁에서 브런치(아침 겸 점심 식사)를 즐긴다. 군대간 아들은 참석하지 못하지만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늘 함께한다.

“딸은 정원에 끌려 집에 온다. 공부로 지친 심신을 식물의 기운으로 보충해야 한다며….” 정 씨의 말이다.

이 씨는 “‘브런치’라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니다”면서 “집에 있는 음식으로 차려 먹거나 빵집에서 사 온 바게트로 간단히 먹는다”며 웃었다.

실내 정원에는 통유리로 된 출입문이 2개 있다. 한 곳은 주방과 연결돼 있다. 음식을 내오기 편리하다. 주방에서 바라보면 큰 유리 너머로 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부 생활은 실내 정원에 스며들어 있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이웃과 지인을 초청해 삼겹살 막걸리 파티를 여는 곳도 실내 정원이다. 온도 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갈탄난로는 파티 때 고구마를 구워내는 조리기구가 된다.

온실에서 파티를 하는 등 화초를 함부로 대한다는 느낌이 든다고 하자 이 씨는 “화초를 아끼지만 사람의 일상생활도 가능해야지요. 식물과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선룸 구상 때 제1 원칙이었다”고 말했다.

정원 가운데에 놓인 탁자는 식탁이 되고 책상도 된다. 볕이 좋은 날이면 정원은 책을 읽는 서재가 된다. 유기농 침구류와 수제 장난감을 수입·판매하는 일을 하는 부부는 집에서 업무를 보는 날도 많다. 2층에 사무실로 사용하는 공간이 있지만 실내정원에서 노트북PC를 펼친다. 날이 풀리는 봄이면 그물 침대를 걸어두고 잠을 청하기도 한다.

글=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사진=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겨울에 빛나는 우리집 정원

구아바 망고 … 베란다는 열대과수원

이 씨는 “화초에 둘러싸여 일하면 피로가 훨씬 덜하다.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도심 사무실에도 온실 속이라고 여겨질 만큼 식물을 많이 들여놓는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고 말했다.

농촌진흥청 산하 원예연구소 김광진 연구사의 연구에 따르면 3.3m²(1평)에 키 30∼100cm의 식물 한 그루만 키워도 실내 오염물질은 10%가량 감소한다. 화초를 보며 산뜻한 기분이 드는 건 단순한 느낌만이 아니다.

○유실수를 키우는 재미

“이건 바나나, 저건 애플망고, 잎이 넓은 이 녀석은 노니나무, 저쪽 베란다 끝에 있는 것은 구아바….”

열대 밀림에 온 것도 아닌데 낯선 이름들이 술술 튀어나왔다. 고현명(34·경기 광명시 광명4동) 씨의 아파트 베란다에는 열대식물이 가득하다. 넓지 않은 베란다에 열대식물 20여 종을 포함해 모두 30여 종 100여 개의 화분이 들어차 있다.

“언젠가는 수목원을 하고 싶은 꿈이 있죠. 너무 먼 미래의 일인 것 같아 우선 아파트에서 열대식물로 시작했지요.”

그는 열대 과실수를 별도 시설 없이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운다고 했다. ‘그럴 리가…, 다 얼어 죽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파트에선 특별한 시설을 갖추지 않고도 생장 최저기온이 영상 10도 정도인 열대식물은 키울 수 있다”며 “겨울밤에 베란다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 거실 문을 조금 열어두고 자면 된다”고 말했다.

고 씨는 열대 식물에 관한 정보를 나누기 위해 인터넷에서 유실수 카페(cafe.naver.com/yusilsu)를 운영 중이다. 자신이 싹을 틔운 모종을 회원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기도 한다.

왜 하필 열대식물일까.

“이색적인 것을 키워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고, 두 아들에게 열매를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고 씨는 4∼5년 동안 유실수를 길러 왔다. ‘이왕이면 먹을 수 있는 것으로 기르자’는 게 그의 생각이다. 요즘은 겨울이라 과일이 달려 있지 않았다. ‘베란다에서 자라면 열매가 제대로 맺힐까’라는 의심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올여름과 가을 사이 구아바가 40∼50개 열렸는데, 손님들이 왔을 때 1, 2개씩 따서 접대용으로 내놓기도 했다”고 말했다.

두 아들 기영(6)과 건영(3)은 부모 덕에 열대과일 맛을 많이 봤다. 유치원에서 나무를 그릴 때는 열대과일 나무에 대해 자랑한다. 나무가 너무 크게 자라면 고 씨는 충남 당진군에 있는 본가로 옮겨 심는다.

열대과일은 씨로 번식하는 경우가 많아 싹을 틔우는 일은 놓칠 수 없는 재미다. 동남아 여행 중 맛본 과일 씨를 가져와 심기도 한다. 자진해서 검역 신고를 한 뒤 1주일 정도 기다리면 씨앗을 우편으로 받을 수 있다. 그는 워낙 잦게 검역 신청을 하다 보니 현재 명예 식물검역원이 됐다.

○새롭게 등장하는 식물들

한 때 난(蘭)을 키우는 유행이 있었다면 요즘은 야생화가 유행이다.

삼육대 유병열(환경원예디자인학) 교수는 “2000년대 들어 야생화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며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과 맞물리면서 작은 야생초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이들은 ‘박새’의 푸른 잎이 넓게 자라는 모습에 감탄하고 ‘남천’의 붉은 단풍과 열매에 황홀해 한다.

정은희(45·서울 성북구 돈암2동) 씨는 ‘히어리’를 좋아한다. “노랗게 올라오는 봄꽃을 보고 있으면 우울했던 기분이 싹 가신다”고 말했다. 그의 아파트 베란다에는 야생화가 140여 종이나 있다. “봄이 되면 철쭉, 개나리, 진달래가 베란다를 가득 메우지요. 지금은 푸른 야생화의 녹음을 즐기는 때지요.”

단아하고 청초한 분위기를 풍기는 야생화에 대한 관심은 그를 생태학교로까지 이끌었다. 사랑하는 야생화를 더 알고 싶어 식물도감을 뒤지는 날도 많았다. 정 씨는 “야생화를 키우고부터는 집안 분위기도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혼자서 돌보던 야생화를 지금은 남편과 10대의 두 아들도 함께 돌본다. 예쁜 야생화를 보면 이제는 남편이 직접 사서 들여올 정도다.

경기 포천시 일동에 사는 윤영미(41) 씨는 야생초를 키우기 위해 마당에 40∼5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온실로 지으려면 평당 300만∼400만 원이 들어 엄두가 나지 않아 찾은 대안이다. 비닐하우스는 둘도 없는 보물 창고다. 높이가 어른 키를 넘기는 큰 나무부터 손바닥 위에 쏙 올라오는 앙증맞은 야생화까지 10여 년 동안 키워 온 식물이 가득하다. “종모양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마취목을 가장 좋아해요. 흰색과 붉은색의 꽃망울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을 몰라요.”

인터넷을 통해 예쁜 식물 사진을 접하고 정보를 구하기 쉬워짐에 따라 최신 품종의 수입이 많아지고 있다. 그만큼 선택의 폭은 넓어졌다.

‘에어플랜트’라는 식물에 관한 인터넷 카페(cafe.daum.net/airplant)를 운영하는 백주현(37·남) 씨는 뿌리가 없이 자라는 식물의 특성에 반해 아예 수입 판매에 나섰다.

파인애플과에 속하는 이 식물은 흙에서 자라지 않는다. 적당히 몸체를 기댈 곳만 만들어 주면 잎이 습기와 양분을 흡수하며 자란다. 아주 선명한 색상의 꽃도 피우고 1년에 4개나 8개의 새끼를 친다. 흙이 필요 없기 때문에 화환 형태로 만든 틀에 넣어서 벽에 걸어서 기를 수도 있다.

‘리톱스’라는 이색 식물도 취급한다. 지름이 2cm 정도인 가시 없는 선인장 종류다. 화분의 크기도 지름이 7∼8cm면 충분해 책상이나 창가에 두고 기르기 좋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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