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최종덕 교수의 빛나는 대담
섣부른 ‘둘로 나누기’ 오류 폭로
“서양적 이성 vs 동양적 직관?
상대성이론은 이성의 붕괴 아니다”
이분법은 그물이다. 이해라는 물고기를 건져 올리기 위한. 이분법은 도마다. 그 물고기를 먹기 좋게 썰어 내기 위한. 이분법은 냉장고다. 먹고 남은 물고기를 잘 갈무리해 두기 위한.
물고기를 잡으면 그물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물의 편리함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그물에 걸리는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이 되고 만다.
그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두 사람이 만났다. 물리학자이면서 인문학적 관심을 토대로 ‘온생명’ 이론을 제창한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와 물리학을 전공하다 철학박사가 된 최종덕 상지대 교수다. “물리학자와 철학자의 대담이라니 골치 꽤 아프겠군”이라며 책을 덮는 사람들은 일대 장관(壯觀)을 놓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대담이라는 형식이 보여 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향연’을 펼쳐 보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 민코프스키와 힐베르트, 로렌츠의 4차원의 수학, 프리고진의 복잡계 이론, 이보디보(진화발생생물학)와 같은 현대과학을 안주로 삼아서 동서양의 철학을 논하기 때문이다.
진정 감탄스러운 점은 하나하나 어렵기 그지없는 그 이론들을 쉬운 말로 풀어 가는 두 사람의 내공이다. 두 사람의 대담이 때로는 고승들의 법거량(法擧量·문답을 통해 깨침을 점검 받는 것)처럼 현기증이 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소리꾼과 고수가 펼치는 판소리처럼 흥겨울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판소리는 여섯 마당으로 구성돼 있다. 과학과 철학, 전통과 현대, 생명, 동양과 서양, 의식과 물질 그리고 자연과 도덕이다. 생명을 제외하면 선명한 이분법이 지배하는 주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무수한 현대과학의 이론을 동원해 그 이분법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두 사람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서양적 이성 대 동양적 직관이라는 이분법이다. 상대성이론과 불확정성이론이야말로 합리적 이성의 승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서양 합리성의 붕괴이자 동양적 직관의 승리로 오해하는 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대표적이다.
장 교수는 상대성이론의 핵심은 상대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하나로 묶은 4차원의 문제를 해소한 것에 있으며 불확정성이론은 세계의 불확실성을 입증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 예측의 수준을 원자 수준까지 향상시킨 것이라고 설명한다.
최 교수는 뉴턴 역학을 기계적이라고 표현하거나 데카르트의 철학을 이분법적이라고 단정하는 사유 방식에서 서양을 축소하고 동양을 확대하려는 자가당착과 아전인수의 심리가 숨어 있다고 꼬집는다.
두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다. 장 교수에 따르면 이해란 ‘자기 속에 설정된 앎의 틀 안에 앎의 내용이 제대로 자리 잡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사람들 속에 설정돼 있는 앎의 틀이다.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이 그토록 어려운 것은 그것이 기존의 앎의 틀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토마스 쿤이 말한 패러다임이다. 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기존의 패러다임을 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비약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다.
생명은 물질의 일부이면서 물질과 차별화되는 특징을 갖는다. 그 특징의 하나로서 의식은 물질에서 생겨났지만 주체성이라는 독자성을 지닌다. 심신일원론이냐 이원론이냐 또는 유물론이냐 유심론이냐는 결국 이 생명의 이해에서 갈린다. 최 교수는 “의식적 주체와 물질적 객체를 구별하는 이원론을 버리고 주체를 삶의 경험 속에서 외부와 만나는 통로로 이해할 것”을 주문한다. 장 교수는 “전체는 하나인데 그것이 음양을 낳고 다시 사상을 낳고 다시 팔괘를 낳는다”는 주역의 구절을 인용하며 ‘일원양면론(一元兩面論)’을 펼친다.
과학 없는 철학은 공허하고 철학 없는 과학은 맹목임을 절감하게 해 주는 책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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