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KBS 사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오만한 권력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이라는 말로 차기 정권을 겨냥한 듯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권력에 대한 비판’은 2003년 4월 취임 이래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말이었다. 그런 정 사장이 정권 교체 시기에 ‘권력 비판’을 주문하는 듯한 모습은 현 정권에서 공영방송 KBS가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DJ정부 ‘신문 때리기’에 편가르기 보도로 동조
盧정부 들어 정권 입맛에 맞는 프로그램 쏟아내
“시대정신 내세워 정치교화 시도… 공공성 상실”
김대중 정부에서는 그 역할을 MBC가 맡은 듯했다. MBC는 ‘미디어 비평’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으로 정권에 비판적인 메이저 신문을 겨냥한 이른바 ‘언론 개혁’ 프로젝트를 뒷받침하고 과거사와 이념 문제를 제기했다. 이처럼 좌파 정권 10년간 KBS와 MBC 등 두 공영방송의 이념 공세는 역할을 분담하는 듯 보였다.
유재천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10년간 KBS와 MBC가 편파 방송을 일삼으며 공영방송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며 “‘시대정신’을 앞세워 정권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민을 정치 교화시켰다”고 말했다.
○ 김대중 정권을 뒷받침한 MBC
김대중 정부가 2001년 ‘언론사 세무조사’로 ‘언론 길들이기’에 나서자 MBC가 먼저 보조를 맞췄다. 이 즈음 김대중 정부와 그에 발맞춰온 언론운동진영 등은 ‘햇볕정책’을 비롯한 이른바 ‘개혁’의 최우선 조건으로 ‘비판 언론 옥 죄기’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당시 국세청의 세무조사 결과가 나오자 공영방송들은 비판 언론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MBC ‘뉴스데스크’는 “국민은 세무조사 당위성에 공감하면서도 정치적 의도가 개입됐다는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며 “이는 일부 언론사가 세무조사를 정치탄압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후 세무조사는 “‘빅 3 신문’을 손보기 위한 타격용이었다”는 증언이 당시 한겨레 청와대 출입기자가 쓴 책에서 나왔다.
MBC는 또 1999년부터 7년여 방영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 과거사와 이념 문제를 제기했다. 현대사의 금기를 깬다는 이 프로그램은 ‘제주 4·3’ ‘보도연맹 1, 2부’ ‘국가보안법 1, 2부’ ‘맥아더와 한국전쟁 1, 2부’ 등으로 논란을 낳았다.
‘PD 수첩’도 ‘송두율과 국가보안법’ ‘친일파는 살아 있다’ 등으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보조를 맞췄으며 ‘미디어 비평’은 2001년 4월 처음 방영한 이래 비판 언론의 논조를 지속적으로 도마에 올려 “일부 신문을 밉게 보는 정부와 눈높이를 맞추거나 방송사의 논조로 사태를 호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정치권 공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정병국 한나라당 의원은 2001년 9월 국회에서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 관련 특집 방송이 급증하는 등 방송이 대통령의 TV가 돼 가는 현실”이라며 “특히 MBC가 공영성 프로그램을 전시효과만 노리고 편성해 공영성과 시청률을 동시에 잃었다”고 지적했다.
○ 노무현 정부 때는 KBS가 이어받아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방송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대통령이 됐겠느냐”며 코드 방송을 부추기는 발언을 했다.
정연주 당시 한겨레 논설주간은 2003년 4월 KBS 사장에 취임한 뒤 ‘미디어 포커스’ ‘한국사회를 말한다’ ‘인물 현대사’ 등 이른바 ‘개혁 프로그램’으로 ‘코드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미디어 포커스’는 MBC ‘미디어 비평’과, ‘한국 사회를 말한다’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흡사한 꼴이었다.
2003년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혐의를 받은 재독 학자 송두율 씨의 귀국 때 KBS의 보도가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KBS는 ‘KBS스페셜-송두율 교수의 경계도시’와 ‘한국사회를 말한다-귀향, 돌아온 망명객들’에서 잇달아 송 씨를 ‘분단 상황을 고민하는 대표적 지식인’으로 미화해 공정성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KBS의 코드 방송은 2004년 탄핵 방송 때 최고조에 달했다. KBS는 탄핵 당일 14시간의 생방송을 통해 탄핵 반대의 목소리를 집중적으로 방영했다. 한국언론학회가 방송위원회의 의뢰로 탄핵방송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해도 편파적”이라고 지적했으나, 정권의 눈치를 본 방송위는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또한 2005년 KBS ‘생방송 시사투나잇’은 평택 미군기지 반대 시위를 보도하면서 시위대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해 방송위원회로부터 객관성 위반 사례로 꼽혔다. 미디어포커스는 2004년 북한 혁명가인 ‘적기가(赤旗歌)’를 배경음악으로 내보내고 2006년 현충일에 6·25전쟁 때 북한을 도운 마오쩌둥(毛澤東)의 대장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기도 했다.
KBS의 한 간부는 “정 사장 취임 이후 지속적으로 편파 방송을 한 끝에 수신료 현실화는 말도 못 꺼낼 정도가 됐다”며 “시청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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