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10일 개봉)은 견고한 냉소의 벽에 균열을 만들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에서 피 말리는 승부 끝에 패배한 한국여자핸드볼 팀의 이야기. ‘한국에선 아무도 안 쳐주는 은메달’인데 그들의 모습은 초라하지 않았다.
고민해 봤다. 생애 최고의 순간이 언제였을까. 주변 사람들도 다들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대학 합격, 취직…. 아이 엄마들은 다들 ‘아이가 태어난 순간’이라 했다. 간절히 원하던 것이 이루어지는 순간, 역시 결과적인 얘기다.
제작사 MK픽처스는 제목을 지을 때 핸드볼 용어도 넣어 보고, 그날의 시간과 장소도 넣어 보며 300여 개의 후보를 만들었고 그중에서 이 제목을 선택했다. 선수들은 패배했다. 이건 ‘과정’에 집중하는 제목이다. 김균희 PD는 “우리도 여기서 ‘최고’가 ‘最高’가 아니라 ‘最苦’ 아니냐는 농담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 국가대표팀의 임영철 감독에게 실제로 최고의 순간이었느냐고 물어 봤다. 영화 마지막에는 그가 울먹이는 인터뷰가 나온다. 그는 그때 ‘앰뷸런스를 대기시켜 놓고 혹독하게 훈련하던 순간’이 떠올라 말문이 막혔단다.
“사실,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것에 답은 없어요. 인생을 좀 더 살아 보고 죽을 때가 됐을 때 생각하면 모를까. 나는 지금도 도전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러나 나중에 ‘최고의 순간’ 후보를 몇 개 꼽는다면 반드시 그때가 들어갈 겁니다. 인간이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역량을 다 쏟아 부었을 때는 실패를 했더라도 ‘이 이상 최선을 다 할 수는 없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만족이 되더라고요.”
영화는 최고의 결과보다는 이를 얻을 만한 ‘자격’을 생각하게 했다. 과정의 가치를 모르는 것은 탈진할 정도로 최선을 다한 뒤에 오는 ‘후회 없다’는 그 느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을 가진 적이) 없죠, 저는. 늘 뭔가 게으름을 피우고…. 이번에도 열심히는 했지만 한계치를 넘진 못했어요. 그 선수들을 보면, 사람이 자기 한계를 넘었을 때는 결과와 상관없이 한 단계 고양되는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영화를 만든 임순례 감독)
인간은 쉽게 안 바뀐다. 아직도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뭐든지 죽도록 열심히 하라고 강요하는 한국적 분위기도 별로다. 매사에 그렇게 죽을힘을 다하다가는 진짜 죽는 수가 있다. 그러나 두 임 감독이 말하는 그 느낌, 살면서 한 번은 경험해 봐야 죽을 때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정말 간절하게 원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우리에게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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