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얽히고 설키고…채무뿐인 인생들…‘미안해, 벤자민’

  • 입력 2008년 1월 12일 02시 56분


◇ 미안해, 벤자민/구경미 지음/272쪽·9500원·문학동네

아마도 구경미(36·사진) 씨의 전작을 기억하는 독자들은, 그의 신작을 받자마자 ‘백수’가 어디 있느냐고 찾을지도 모른다. 첫 소설집 ‘노는 인간’의 이미지는 그만큼 강했다. 그것은 뒤이어 잇달아 나온 이른바 ‘백수소설’들의 선두에 놓였다. 백수는 이 풍요로운 시대의 사생아쯤 되겠지만, 구 씨의 ‘노는 인간’을 비롯한 소설 속 백수들은 분노를 느끼기보다 무력과 피로에 푹 빠져 있었다.

첫 장편 ‘미안해, 벤자민’에도 ‘백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재미는 백수가 얼마나 개인적인 무력감으로 허우적대는지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장편은 그야말로 ‘이야기 전략’이 있어야 하는 장르다. 작가는 비중이 비슷한 인물을 꽤 많이 등장시키고, 영화에서 본 듯한 설정을 세우고, 장(章)마다 화자를 달리해 가면서 독자를 어지럽히는 전략을 쓴다.

그래서 이야기는 다소 복잡해 보인다. 일단 작품의 주인공은 기억을 잃어버린 여성 이연주(드라마에 나오는 기억상실증!). 그는 정신과에서 받아온 약을 먹는 척하지만 몰래 벤자민 화분에 줘 버리는 여성이다. 연주는 회사 주변 식당에서 항상 덩치 큰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한 남자와 마주치는데, 그 남자가 누군가를 닮았다 했더니 오래전에 죽은 선배 광호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가 하면 연주가 마주치는 남자 조용희는 사채를 끌어다 써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 나머지 사채업자가 붙여 놓은 덩치들에게 종일 감시당하는 처지다(영화다!). 조용희와 만나게 된 연주(그 사이에 조용희의 부인과, 부인이 연애하는 사채업자에 관한 얘기가 있다. 인물이 줄줄이 엮여 이어진다), 조용희를 괴롭히는 사채업자 김길준을 ‘처치하기’ 위해 납치감금 전문업자인 대학 동기 안수철에게 전화를 건다(납치감금 전문업자란 말 자체가 만화 같다).

안수철은 연주를 두 아이의 새 엄마로 찍어놓고(여기서부터 얘기가 점입가경 분위기다), 김길준을 납치해 산속 별장에 가둔다. 그런데 연주는 딴마음이다. 연주는 김길준의 동생 세준에게 접근해 결혼할 생각을 갖고 있다. 이 세준이 바로 구경미 하면 떠오르던 ‘백수’의 전형인데, 전개상 다소 황당하게도 백수로서의 최소한의 품위를 접고 형이 소유한 빌딩의 야간경비원 일을 하겠다고 한다. 왜냐하면 연주를 향한 사랑 때문이다(갑자기 신파로 바뀐다)!

그러나 이 롤러코스터 같은 진행은 거칠거나 서투르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부자연스럽다는 느낌도 없다. 문학적인 단문을 이어가면서 속도감 있게, 그러면서 꽤 흥미진진하게 얘기를 벌여 나간다.

이야기 아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를 둘러싼 빚들’이 보인다. 사채로 고통받는 조용희뿐 아니라, 짝사랑에 대한 부담의 빚(연주는 자신을 짝사랑하는 선배 광호를 매정하게 대했기 때문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나쁜 일을 한 데 대한 빚(김길준을 산속에 감금해 놓고 연주는 그의 가족에게 빚을 느낀다)…. 그러나 독자들은 서사 아래 직조된 의식보다는, 엉뚱한 이야기 그 자체를 먼저 즐길 듯하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