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지그프리트, 탄호이저, 로엔그린, 트리스탄, 파르지팔….
영웅은 두려움을 모르는 존재다.
그는 권력과 황금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는 욕심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이다.
그러나 인간 영웅의 대부분은 유혹에 약하고 완성되지 못한 인격 때문에 방황한다. 그래서 바그너 오페라에서 영웅 캐릭터를 맡는 주역을 ‘헬덴(영웅적) 테너’ ‘헬덴 바리톤’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부른다.》
지난해 말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1980∼90년대를 풍미했던 ‘헬덴 테너’ 지그프리트 예루잘렘(68)을 만났다. 그는 서울국제음악콩쿠르 성악부문 심사위원으로 참가 중이었다. 그에게 ‘헬덴 테너’의 자질이 뭔가 물었다. 예루잘렘은 “글쎄, 끝까지 버티는 힘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하긴, 금관악기가 불을 뿜고 무한선율이 계속되는 바그너 오페라에서 ‘끝까지 버티는 자’가 영웅이 되는 것은 맞는 말이다.
주말 내내 ‘링 사이클’ 감상에 푹 빠졌다. 특히 ‘지그프리트’와 ‘신들의 황혼’에서 예루잘렘은 훤칠한 키에 장발을 휘날리며 영웅 지그프리트의 풍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성악가가 되기 전에 17년 동안 바순주자로 활약했다는 예루잘렘은 특유의 볼륨감 있는 성량과 강한 표현력으로 무대를 이끌었다.
바그너의 ‘링 사이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영웅 지그프리트다. 바그너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반지를 되찾아 오는 사명을 짊어진 지그프리트의 영웅담을 그리기 위해 ‘니벨룽의 반지’를 기획했다. 지그프리트는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신화에서 가장 빛나는 전설적인 영웅.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왕자도,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공주에게 키스하는 왕자도 지그프리트다. 바그너는 자신의 외아들에게도 지그프리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예루잘렘 역시 “내 증조할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첫 아들에게 지그프리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소개했다.
이렇듯 독일과 북유럽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두려움을 모르는 영웅’ 지그프리트도 브륀힐데와 사랑을 하면서 난생 처음으로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짐을 느낀다. 그는 사랑이란 감정이 두려움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를 두렵게 만든 것은 괴물도, 불도, 권력도, 황금도 아닌 사랑이었다.
“사랑의 힘을 포기하는 자가 반지를 갖게 될 것이다.”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절대 반지에는 이런 특별한 조건이 달려 있었다. 라인강 물 속에서 세 처녀를 탐내던 난쟁이 알베리히는 어차피 사랑을 얻을 수 없게 되자 “나는 사랑을 저주한다”고 외친 후 황금을 훔쳐낸다. 거인족의 파졸트도 보탄의 처제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는 대가로 황금과 반지를 받은 후 동생 파프너에게 죽임을 당한다. 불세출의 인간 영웅으로 반지를 차지했던 지그프리트마저도 결국 사랑에 대한 신의를 저버려 목숨을 잃는다. ‘신(神) 중의 신’인 보탄이 다스리는 천상의 ‘발할성’도 끝내 반지의 저주로 불타버린다.
피터 잭슨 감독의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도 프로도는 절대 반지를 손에 넣은 후 한 번도 편하게 잠을 못 잔다. 절대 반지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에 가깝다. 사람들은 지금도 꾸준히 권력과 재물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곁에 있는 사랑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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