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철들어 둔감해진 우리…철 덜든 詩로 간절하고 싶어”

  • 입력 2008년 1월 18일 03시 02분


음식연작시편 등 50여 편의 시가 실린 새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를 낸 안도현 씨는 “음식을 정성스럽게 만들 듯 시는 공들여 써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제공 창비
음식연작시편 등 50여 편의 시가 실린 새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를 낸 안도현 씨는 “음식을 정성스럽게 만들 듯 시는 공들여 써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제공 창비
《‘찹쌀을 고들고들하게 쪄서

엿기름물에 담고 생강즙과

고춧가루 물로 맛을 내 삭힌

이 맵고 달고 붉은 음식을

특별히 안동식혜라고 부른다

잘 삭은 밥알이 동동 뜨고

나박나박 썬 무와 배도 뜨고

땅콩 몇 알도 고명처럼

살짝 뜨는데,

(…)

야릇한 식혜의 빛깔 앞에서

그만 어이없어 ‘아니,

이 집 여인의 속곳 헹군 강물을

동이로 퍼내 손님을

대접하겠다는 건가?’ 생각하고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안동식혜’에서)》

안도현 시인 9번째 시집…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시편 눈길

안도현(47) 시인은 강원 인제군 백담사 만해마을에 머물고 있다. 새 시집을 내고 산골로 숨어버리느냐고 살짝 투덜댔더니, “원고 쓸 게 있어서…”라는 자분자분한 음성이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요즘은 시도 여가로 쓰는 게 아니라 시간을 갖고 집중해야 쓰이더라”고 덧붙였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라는 제목의 새 시집 중 특히 도드라지는 2부의 음식연작도 1년 반 전부터 마음먹고 작업한 것이다.

‘양동이 속에 퍼부어주면/좋아서 저희끼리 물 위에 올라앉아/새끼오리처럼 동동거렸’던 물외(오이), ‘걸쭉하고 화끈거리는 그 국물에 밥을 척척 말아먹고 서늘한 땀을 흘려야 여름이 서너 발짝쯤은 물러날 것 같았’던 닭개장, ‘밥알보다 나물이 많아서 슬픈’ 갱죽, ‘바다의 자궁이 오글오글 새끼들을 낳을 때 터뜨린 양수’ 같던 매생잇국….

일찍이 먹어 본 음식을 떠올릴 때 그 맛뿐 아니라, 만들 때 재료의 촉감, 씹을 때의 소리, 볼 때의 빛깔 등 온갖 감각이 되살아난다.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에게 감각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고 시인은 설명한다. 백석을 흠모해 언젠가 백석처럼 음식시편을 쓰리라 다짐했던 그는, 그 소망을 이루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학적 감각이 향기롭게 회복되는 것을 느낀 게 무엇보다 큰 성과라고 했다.

스물다섯 살에 첫 시집을 낸 뒤 아홉 번째 시집에 이르렀다. “설렘이나 떨림이 줄어드는 건 사실이지만, 한 권 한 권 낼 때마다 새롭게 보여 주지 않으면 ‘죽음’이라고 생각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전작과 무엇이 달라졌느냐고 묻자, 그는 “철없어졌죠”라면서 웃었다. “돈 많이 벌고, 좋은 아파트에 살고…. 요즘 사람들이 꿈꾸는 것, 지나치게 철들어 버려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서요. 나라도 철 덜 든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던 걸요.”

‘쌀쌀맞던 80년대’와 ‘왼쪽 아니면 오른쪽으로 기울기 일쑤였던’(‘예천 태평추’에서) 시간을 지나 오늘에 이른 시인. ‘예천 태평추’의 마지막 시구 ‘그날 밤 하느님이 고맙게도 채 썰어서 내려보내 주시는 굵은 눈발을 툭툭 잘라 태평추나 한 그릇 먹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간절하게 참 철없이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처럼, 그는 “간절하게 참 철없이” 시를 쓰기를 바란다. ‘따뜻하고 배부른’ 시집을 세상에 보내면서 그는 “이 세상 질서와는 좀 다르게 살아가는 즐거움을 독자들이 헤아리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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