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보면 더 재미있는 미술]이 소녀, ‘性호르몬’을 집어들었다

  • 입력 2008년 1월 18일 03시 02분


17세기 중반 네덜란드의 어느 상류층 집안의 식탁. 한 소녀가 손에 뭔가를 들고 막 먹으려 하고 있다. 한데 정면을 응시하는 소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생기발랄함은 온데간데없고 농염하기까지 하다.

소녀가 손에 들고 있는 음식은 바로 생굴. 왜 이 소녀는 굴을 먹으며 이런 표정을 지었을까. 15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는 미술 전문가와 영양학자, 비만 전문가가 모여 그 수수께끼를 풀어 봤다.

○ 굴은 상류층의 탐욕 상징

굴은 16∼18세기 그려진 정물화에 단골 메뉴처럼 등장한다. 바다에 인접한 네덜란드는 비교적 굴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17세기 화가 얀 스테인의 작품 ‘굴을 먹는 소녀’에도 응당 굴이 등장한다. 그런데 화가는 왜 소녀의 표정을 그처럼 짓궂게 그렸을까.

“오랫동안 서양인들은 굴을 탐욕과 에로티시즘의 상징으로 봐 왔어요. 이제 막 성(性)에 눈을 뜨기 시작한 소녀의 묘한 눈빛도 바로 그런 점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어요.”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의 설명이다. 실제로 굴은 초콜릿과 함께 자연이 내린 최고의 최음제로 불려 왔다. 세기의 난봉꾼 카사노바도 하루 40∼50개씩 즐겨 먹었다고 한다.

김희선 배화여대 겸임교수는 “미식가들은 식사를 하기 전 입맛을 돋우기 위해 굴을 먹는다”며 “굴은 콜레스테롤을 줄여 주는 타우린 성분이 풍부하고, 남성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하는 아연의 함량이 다른 어패류보다 높다”고 했다. 성호르몬이 많아지면 성욕도 증가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비만 전문가인 박용우 전 성균관대 의대 교수는 “정자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아연은 섹스 횟수가 잦은 사람일수록 부족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굴이 직접적으로 성욕을 유발한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고 했다. 또 “아마도 부족해진 영양소를 보충하기 위해 굴을 먹으면 좋다는 사실이 와전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정물화에 나타나는 굴 옆에는 항상 레몬이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신맛을 내는 레몬의 산 성분이 굴의 단백질과 결합하면서 쫄깃한 맛을 더해 주죠. 또 레몬즙을 뿌리면 염기인 아민과 산 성분이 반응해 굴의 비린내를 없애 줘요.”

김 교수의 설명이다.

여기에 이 관장은 레몬의 숨은 뜻을 한 가지 더 지적했다.

“레몬의 강한 신맛은 입안을 톡 쏘며 정신을 번쩍 들게 해요. 그래서 레몬을 과식하는 일은 없죠. 굴 옆에 그린 레몬은 탐욕을 경계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 뚱뚱해지고 싶은 농부들의 백일몽

당시 굴과 레몬은 지배 계급의 전유물이었다. 건강에 유익한 불포화지방과 다양한 비타민을 섭취할 수 있는 특권은 일부 상류층에만 돌아간 것. 반면 농민의 먹을거리는 소박했다. 기껏해야 ‘지금 먹는 음식이라도 많이만 먹어 봤으면 좋겠다’는 게 소원이었다. 16세기 네덜란드 풍속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작품 ‘게으름뱅이의 천국’은 이를 잘 드러낸다. 평화로운 어느 오후, 한껏 배불리 먹은 사내 셋이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다. 주위엔 먹다 남은 빵과 소시지가 나뒹굴고, 멀리 우유로 가득 찬 호수가 보인다.

희멀건 옥수수죽과 통밀로 만든 퍽퍽한 빵으로 연명하는 가난한 농민에겐 그야말로 꿈같은 세계다. 사내들은 한결같이 튀어나온 배와 볼록한 허리, 굵은 다리를 갖고 있다. 박 전 교수에 따르면 작품에 등장하는 사내들의 체형은 한결같이 운동 부족에, 탄수화물을 과다 섭취한 비만 환자에 가깝다. 당시 농부들은 굴 같은 해산물은 꿈도 못 꾸고 열량이 높은 탄수화물 위주로 식단을 짰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박 전 교수는 “농부들은 높은 열량을 섭취했지만 활동량이 많아 그림 속 등장인물처럼 살찔 겨를이 없었을 것”이라며 “아마도 노동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농부들의 이상형을 그려 넣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도 “쌀과 밀의 눈에는 탄수화물의 대사를 촉진하는 비타민 B 같은 성분이 들어 있다”며 “설사 과식을 한다고 해도 살이 찐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고 했다.

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 이 기사에는 비만 전문가인 박용우 전 성균관대 의대 교수와 영양학자 김희선 배화여대 겸임교수, 미술 전시기획자인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이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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