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메헤렌(1889∼1947)의 위작 사건은 지금도 미술계 최대의 충격으로 꼽힌다. 네덜란드의 화상인 그는 1930년대 중반부터 40년대 초반까지 ‘진주 귀고리 소녀’로 유명한 화가 얀 베르메르(1632∼1675)의 미공개작을 잇달아 선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나치의 사령관 헤르만 괴링에게 베르메르의 작품을 판 것이 문제가 되어 전범으로 몰리자, 놀라운 증언을 했다. 그간 그가 내놓은 베르메르의 작품은 모두 자신이 그렸다는 것.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자 법정에서 메헤렌은 직접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그는 국보급 작품을 적에게 팔아넘긴 중죄 대신 위작 제조라는 가벼운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우광훈(39·사진) 씨의 장편소설 ‘베르메르 VS. 베르메르’의 주인공 가브리엘 이베스는 이 반 메헤렌을 모델로 삼았다. 그는 이 희대의 사기극의 장본인에게 상상력을 덧입혀 극적인 생애를 연출한다.
소설은 유럽에 체류 중인 한국인 큐레이터가 베르메르의 미공개 작품 ‘지도를 바라보는 여인’을 갖고 있다는 네덜란드인 브렌다 이베스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브렌다는 베르메르의 그림을 위작한 사람으로 유명한 가브리엘 이베스의 딸이다. 부친에 대한 브렌다의 기억과 여러 자료를 모아 한국인 화자가 가브리엘 이베스의 삶과 내면을 들려주는 것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국내 작가가 해외의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해외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는 일은 흔치 않다. 우리 문학의 관심이 그만큼 폭넓고 다양해졌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차분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문체에 스민 풍부한 미술사적 지식이, 많은 책과 자료를 토대로 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작가가 설정한 ‘위작 화가로서의 가브리엘의 운명’은 대중성을 좇지 않는 완고함에서 비롯된 것. 유명 화가가 되고 싶었던 가브리엘이 살던 시대는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등 새로운 예술사조들이 추앙받던 때다. 고전적인 사실주의 화풍을 추구하는 그는 ‘복사 화가’로만 여겨졌던 것. 좌절한 그에게 다가온 제안은 ‘위작 화가가 되라는 것’이다.
좀처럼 꿈을 포기하려 하지 않지만 생활고에다 인정받지 못하는 절망까지 겹친 가브리엘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음을 작가는 찬찬히 보여준다. 또한 브렌다가 보여준 ‘지도를 바라보는 여인’을 실제로 누가 그렸는가에 대한 의문을 간간이 던짐으로써 소설적 재미를 이어간다.
한때 숭배되었던 가치가 무시되고 붕괴되는 시간의 흐름을 안타깝게 짚기도 한다. 실제로 위작 사건으로 법정에 선 가브리엘 이베스는 “미술계의 열외자로 전통을 지향하는 나를 냉대했던 세상을 향한 복수극”이었다고 밝힌다.
잘 알려진 사건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원작 없는 위작은 예술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가브리엘 이베스가 그린 그림은 베르메르의 화풍을 따르되, 베낀 게 아니라 없는 것을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그의 경우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이 악마와 손잡았던 것으로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그보다는, 세속을 좇는 속물적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예술적 가치를 어떻게든 계속 추구하고 싶어 했던 인간의 고뇌로 읽힌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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