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연기가 의상이고, 세트다” 큐빅 위에 선 햄릿

  • 입력 2008년 1월 31일 02시 58분


극단 ‘골목길’의 박근형 대표가 소주잔을 앞에 둔 채 연극 ‘햄릿’ 출연 배우들의 연습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한 배우는 “술잔이 늘어날수록 더욱 예리하고 냉정한 지적이 나온다”고 말했다. 아래 사진은 ‘햄릿’에 출연하는 배우들. 신원건 기자
극단 ‘골목길’의 박근형 대표가 소주잔을 앞에 둔 채 연극 ‘햄릿’ 출연 배우들의 연습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한 배우는 “술잔이 늘어날수록 더욱 예리하고 냉정한 지적이 나온다”고 말했다. 아래 사진은 ‘햄릿’에 출연하는 배우들. 신원건 기자
박근형 연출 극단 골목길 ‘햄릿’이유 있는 갈채

이런 ‘햄릿’도 있을까.

왕궁 세트라고는 네모상자(큐빅) 7개뿐인 무대. 그 위에 올라선 햄릿은 평범한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단순한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오필리어도 흰 옷을 입은 가녀린 기존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중세풍의 화려한 의상도, 실감나는 분장도 없었다. 오필리어의 아버지(폴로니우스)로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 대신 긴 생머리를 가지런히 묶은 25세의 젊은 여배우가 등장했다.

29일 밤 서울 종로구 혜화동 게릴라극장에서 막이 오른 ‘햄릿’. 최근 연극계 스타 연출가로 떠오른 박근형(45) 대표와 그가 이끄는 극단 골목길이 내놓은 첫 셰익스피어 연극이라는 점에서 객석은 가득 찼다. 별다른 세트도, 분장도, 조명의 힘도 빌리지 않고 오직 배우의 힘만으로 무대를 채운 이 작품에 팬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개막하기 전 햄릿 연습 현장을 되짚었다.

○ 무대위 소품은 네모상자 7개뿐

24일 오후 9시 명륜동 지하 연습실. 무대 앞에는 연출을 맡은 박 대표가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극단 연습실의 ‘상징’과도 같은 소주 2병이 놓여 있었다. 안주는 군밤과 아몬드.

리허설 무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큐빅 가져와라.” 가로세로 50cm 정도의 정육면체 7개가 올려졌다. “솔직히 저것도 필요 없어요. 무대에는 배우만 있으면 돼요. 그게 연극이에요.” 박근형 연출의 연극 철학이자 극단 골목길의 특징.

‘골목길’의 배우 겸 무대 감독을 맡고 있는 김도균은 “박 대표는 ‘형광등 하나만 켜고도 좋은 공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우리 극단에서는 스태프가 별로 할 일이 없다”고 했다.

‘드레스 리허설’(진짜 공연처럼 의상을 차려입고 하는 연습)인데도 오필리어의 아버지를 맡은 여배우 박미녀나는 검은색 바지 정장 차림이었다. 그게 무대 의상이다. “연기를 통해 폴로니우스임을 관객에게 인식시키면 되지 가발이나 목소리 변조, 의상이 필요한가요. 인간 폴로니우스를 표현하는 데는 남녀노소의 구분이 무의미합니다.”

○ 빈칸 남겨둔 대본 채우는 건 배우들의 숙제

남자 광대가 퇴장하려 하는 장면. 순간 박 대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상균아, 나가면서 뭔가 임팩트 있는 대사가 없을까? 넌 그냥 엑스트라가 아니야. 네가 그렇게 나가면 사람들은 ‘이 장면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한다고….”

작품의 대본은 늘 미완성이다. 대본이 완성되는 것은 연습 현장에서다. 수시로 대사가 생겨나고 사라진다. 배우들도 대사를 스스로 완성해야 한다. 이날 연습실에서 햄릿에게는 “치아는 인간의 초석이지. 국가의 초석이 뭐뭐 이듯이”라는 대사가 새로 주어졌다. ‘뭐뭐’를 채우는 것은 100% 배우의 몫.

‘햄릿’ 역의 김주완은 ‘뭐뭐’를 채울 수 있는, 그리고 광대역의 김상규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대사를 찾기 위해 연습 내내 고민해야 했다.

첫 공연 날. 햄릿은 ‘뭐뭐’를 ‘백성’으로 채워 넣었고, 광대는 관객들을 향해 삿대질하며 “오오∼ 처참한 몰골이 되었구나”라고 외쳤다.

○ ‘연극 같은’ 연기는 사절

“광영아, 넌 가족 관계가 어떻게 돼?” “네. 부모님이 계시고요, 1남 1녀에 제가 장남입니다.” “그래, 그렇게 자연스럽게 말해. 근데 대사할 때는 왜 그렇게 과잉이야.”

박 대표는 ‘연극 같은’ 대사 톤은 질색이다. “과장되고 인위적인 말투는 관객을 지루하게 만들기 때문”이란다. 골목길이 요즘 젊은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각광받는 이유 중 하나는 과장되지 않은 빠른 일상어투 덕분이다.

오필리어가 광란에 빠진 햄릿을 끌어안고 내뱉는 “처참한 이 몰골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하다니”라는 대사도 일상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발 이러지 말아요”로 간명하게 바뀌었다.

술잔을 쥔 박 대표의 손이 쉴 새 없이 입을 오갔다. 세밀한 부분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호레이쇼, 왕자를 포옹하는 데 전혀 힘이 없어. 친한 친구 사이잖아. 힘줄이 보이도록 안아야지.”

연습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처음엔 세트는커녕 소품 같아 보이지 않던 7개의 큐빅이 배우의 연기에 따라 어느새 덴마크 궁정으로, 귀족의 저택으로, 해적의 선박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배우 김도균은 “그것이 골목길 연극의 힘”이라고 말했다.

2월 17일까지. 1만5000∼2만 원. 02-763-1268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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