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의&joy]내장사∼백양사 겨울 트레킹

  • 입력 2008년 2월 1일 02시 59분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 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 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 하였네

…………………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 오르겠네

봉준(琫準)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 부분>》

하얀 눈길 밟아 핏빛 녹두장군 품에 뛰어들다

“봉준이 이 사람아, 더운 국밥 한 그릇 못 말아 먹이고 보내다니….” 가슴이 짠하다. 코끝이 찡하다. 1894년 갑오년 겨울은 추웠다. 농민군들은 조선 천지 어느 한곳 발붙일 데가 없었다. 공주 우금고개의 패배가 뼈에 시렸다. 관군과 일본군의 추적은 사냥개처럼 질겼다.

전봉준(1855∼1895)은 전주 모악산 아래 원평에서 흩어진 농민군 1만 명을 다시 불러 모았다. 그리고 12월 21일(음력 11월 25일) 조선·일본 연합군 300명과 맞붙었다. 하지만 싸움이 되지 않았다. 구미란 논배미에 시체가 즐비했다. 사람들은 후에 그곳을 송장배미라고 불렀다. 전봉준은 이틀 뒤인 12월 23일 태인에서 남은 8000명으로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조총이나 화승총으로 기관총을 막을 순 없었다. 전봉준은 ‘칼 울음’을 울었다. 곧바로 농민군을 해산했다. 그리고 장사꾼 차림으로 지금 내장산국립공원 안에 있는 입암산성으로 스며들었다.

○미끄러운 눈길 따라 4∼5시간이면 닿아

겨울 내장산은 적막하다. 뼈만 남아 웅크리고 있다. 나무들은 촘촘하게 먹 선을 그으며 서 있다. 부르트고 갈라진 언 살. 껍질에 번지는 부석부석 마른버짐. 하얀 눈이 그 사이를 메우며 여백을 만든다. 하늘은 아슴아슴 잿빛이다. 가을 붉은 단풍바다는 이제 담담한 수묵화가 되었다. 사람들 흔적도 거의 끊겼다. 바람은 골짜기를 하모니커 삼아 잉잉 불어댄다.

내장산 들머리에 서있는 감나무들은 아직도 붉은 감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바람과 햇볕에 육탈이 되어 쪼글쪼글 ‘미라 감’이 되었다. 산새들도 몇 번 쪼다가 그만둔다.

내장산국립공원은 크게 3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내장사를 에워싸고 있는 내장산과 백양사를 품고 있는 백암산, 그리고 입암산성이 있는 입암산이다. 위쪽에 내장산, 아래가 백암산, 왼쪽에 입암산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3개산은 능선으로 이어진다. 꼭짓점을 이으면 거의 정삼각형. 내장산∼백암산, 입암산∼백암산, 내장산∼입암산의 거리가 절묘하게 등거리(약 8∼9km)를 이루고 있다.

내장산은 왼쪽부터 서래봉(624m)―불출봉(622.2m)-망해봉(679.3m)―연지봉(670.6m)―까치봉(717m)―신선봉(763.2m)―연자봉(675.2m)―장군봉(696.2m)이 말발굽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한바퀴 도는 데는 6∼7시간. 가을에 이 코스를 따라 걸으면 눈 아래 ‘붉은 단풍의 바다’를 취하도록 볼 수 있다.

산 꾼들은 보통 내장사에서 백양사로 넘어가는 코스를 즐긴다. 내장산 까치봉에서 소동근재∼순창새재를 거쳐 백암산 최고봉인 상왕봉(741.2m)으로 가는 코스다. 천천히 걸어도 4∼5시간이면 닿는다. 가을엔 내장산의 활활 불타는 단풍과 백암산의 새악시처럼 수줍은 단풍을 두루 볼 수 있다. 봄엔 남쪽 백암산부터 연둣빛이 진해져 북쪽 내장산으로 갈수록 연해진다. 가을 내장사, 봄 백양사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겨울 내장사에서 백양사 가는 길은 대부분 눈길. 3월이나 돼야 녹기 시작한다. 아이젠 없이 가다간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언뜻언뜻 골짜기 물이 졸졸 흐르고, 양지바른 비탈에 연둣빛 새싹들이 보인다. 봄이 소리 없이 오고 있다. 살갗에 닿는 바람이 매콤하면서도 달다.

○고즈넉한 백양사 시끌벅적 내장사

1894년 12월 25일 전봉준은 입암산성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의 목엔 ‘군수직과 현상금 1000냥’이 걸려 있었다. 입암산성은 후백제 견훤의 요새.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왜군과의 격전지였다. 코앞 장성 갈재(蘆嶺)를 넘으려면 이곳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산성엔 관군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비대장 이종록은 전봉준을 감쌌다. 오히려 추격대가 포위망을 조여 오자 그 사실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이종록은 이로 인해 후에 삭탈관직을 당했다.

12월 26일 전봉준은 입암산(626m)∼장성새재∼순창새재∼백암산 상왕봉∼사자봉(722.6m)을 거쳐 백양사 청류암에 숨었다. 백양사 스님들은 그의 동지나 마찬가지였다. 우금치전투 때 유명한 농민군 승려대장도 바로 백양사 출신. 스님들은 아무도 전봉준을 고발하지 않았다. 청류암엔 전봉준이 마셨다는 샘물 남천감로수가 아직도 남아 있다.

12월 28일 전봉준은 다시 옛 부하였던 순창 쌍치 피노리(避老里)의 김경천 집을 찾았다. 피노리는 조선시대 당파정쟁 중에 노론들이 피했던 곳이라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 그만큼 숨어 살기 좋은 곳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었다. 김경천은 그의 대장을 밀고했고, 전봉준은 붙잡혔다. 입암산성의 관군도, 백양사의 스님도 그를 감쌌는데 옛 부하가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그 하루 전인 12월 27일 김개남도 피노리에서 8km 떨어진 정읍 산내 종성리에서 친구의 밀고로 붙잡혔다.

1907년 가을 강증산(1871∼1909)은 그의 제자들과 피노리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봉준의 한을 풀어주는 굿(해원공사·解寃公事)을 벌였다.

“전봉준은 진실로 만고의 명장이다. 백의한사(白衣寒士)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였다. 세상 사람들이 전봉준의 힘을 많이 입었나니 감히 그의 이름을 해하지 말라”

백양사는 고즈넉하다. 천년 묵언 정진하는 백암산을 닮았다. 백암산은 글자 그대로 흰 바위산. 가타부타 말이 없다. 백양사는 선승의 요람이다. 늘 조용하고 단아하다. 내장사가 시끌벅적한 저잣거리 인간세상이라면, 백양사는 흰 학이 노닐고 구름이 떠다니는 신선의 세상이다.

백양사 앞 장성들판에는 연초록 아기 보리들이 우우우 종주먹을 쥐고 일어선다. 바람이 불어도 먼저 눕지 않는다. 가마니 들것 위에 앉은 녹두장군 같다. 비록 잡혔지만 당당하고 눈빛이 형형했던 조선 사내.

◇내장사 가는 길(내장산사무소·063-538-7875∼6)

▽승용차=호남고속도로∼내장사 나들목∼내장사

▽고속버스나 기차로 정읍까지 간 뒤 정읍에서 내장산행 버스(20분)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

▼ 뜻 같았지만 길 달랐던 녹두와 강증산▼

강증산은 전봉준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는 전봉준과 같은 고부 땅에서 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직접 만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나이는 전봉준이 16세 위.

강증산도 양반이었지만 가난했다. 어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나 땔나무를 팔아 살았다. 1894년 전봉준이 농민전쟁에 나섰다. 하지만 피 끓는 스물 셋의 강증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봉준의 무장 투쟁에 드러내 놓고 반대했다. 증산도 이 썩은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데엔 생각이 같았지만, 결국 불쌍한 백성들만 죽어난다는 것이었다.

증산은 ‘세상을 바꾸려면 땅과 하늘의 질서를 송두리째 뜯어 고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버림받고 천대받던 모든 생명이 하늘같이 대접받는 세상, 바로 그런 후천개벽 세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봉건 반외세의 무장혁명을 꿈 꿨던 전봉준. 우주 삼라만상의 후천개벽을 꿈꿨던 강증산. 증산은 동학군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겨울에 쫓겨서 죽을 것”이라며 빨리 빠져나오라고 설득했다. 동학군 지휘부에는 “무고한 백성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뜨리지 말라”고 외쳤다.

전봉준은 1895년 교수형을 당했다. 증산도 1909년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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