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에 대한 기록들은 웬만한 문학 작품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작가 마커스 주삭(33)이 어렸을 적 독일인 어머니에게 들었던 얘기도 그랬다. 불붙은 듯 시뻘건 하늘 아래 끌려가던 유대인 포로 행렬. 길 가던 한 소년이 그 행렬에서 수척한 노인을 발견하고 빵을 건네준 장면을 본 병사가 소년과 노인에게 채찍을 휘둘렀다는 이야기. 이 광기 어린 사건을 작가는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다.
소설 ‘책도둑’은 사신(死神)이 들려주는 홀로코스트 이야기다. 첫 20쪽 사신의 독백이 좀 당혹스럽지만 그 대목을 넘기면 이야기는 금세 탄력을 받는다.
주인공은 아홉 살 소녀 리젤. 아버지는 행방불명, 어머니는 아이들을 양부모에게 맡긴 후 떠나 버렸고, 남동생은 양부모에게 오는 길에 목숨을 잃었다. 생면부지의 어른들과 홀로 지내게 된 소녀. 다행히 양부모가 거칠지만 속정이 깊어 리젤이 운이 나빴던 건 아니었다.
소설의 제목은 주인공 자신을 가리킨다. 끔찍한 시간을 리젤이 견뎌 나가는 방식은 책을 훔치고 그것을 열정적으로 읽는 행위다. 남동생의 장례식에서 땅에 떨어진 책 ‘무덤 파는 사람을 위한 안내서’를 갖고 온 것을 시작으로, 리젤은 나치의 방화 현장에서, 다른 사람의 서재에서 책을 훔친다.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유대인 청년 막스의 등장이다. 양아버지 한스의 목숨을 구해 줬던 친구의 아들 막스를, 한스는 기꺼이 숨겨 준다. 권투선수 출신인 막스와 몰래 우정을 쌓으면서, 흰 종이 위 활자가 전해 주는 이야기를 탐독하면서 리젤은 성장해 간다.
독특한 캐릭터는 이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품 넓은 양부모도 그렇거니와 리젤에게 연정을 품은 순수한 소년 루디, 히틀러와 권투 경기를 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막스 같은 인물들의 개성적 묘사는 독서의 즐거움을 더해 준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공습 대피소에서 리젤이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모습은 이 책의 클라이맥스다.
‘리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겁에 질린 눈이 자신에게 매달려 있다는 것을 느꼈다. 리젤은 단어들을 잡아당겼다가 숨으로 뱉어 냈다. 목소리 하나가 그녀 안에서 음들을 연주했다.’
전쟁의 공포를 견디게 해준 책을 리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읽어 주면서 위로를 전하는 부분은 문자의 소중함과 책의 힘을 한눈에 보여 주는 대목이다. 여기에 작가가 어머니에게 들었던 ‘빵’의 에피소드가 섞인다. 이야기 속 소년 대신 빵을 전하는 것은 양아버지 한스다. 유대인에게 빵을 줬다는 이유로 한스는 전쟁터로 끌려가고, 리젤은 책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 쓰기로 한다.
인디펜던트 리뷰는 ‘단지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적었다. 우리 자신이 동시에 갖고 있는 선과 악을, 과장하지 않으면서 시적이고 서정적인 방식으로 전하는 작가의 주제의식은 이 소설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원제 ‘A Book Thief’(2006년).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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