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은 1923년 경북 경주시 안강읍에서 소작농의 6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18세에 결혼해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22세 되던 해 남편이 징병으로 끌려가자 경주로 돌아왔다가 중국의 방직공장에서 사람을 모집한다는 말에 속아 1945년 3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지 할머니는 그해 8월 조국이 광복됐지만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인과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고인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다 한국적십자사의 도움으로 2000년 6월 1일 귀국해 위안부 할머니가 모여 사는 나눔의 집에서 지냈다.
이후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의 수요 집회에 참가하고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영상편지를 미국 하원 낸시 펠로시 의장과 톰 랜토스 외교위원장, 마이크 혼다 의원에게 보내 지난해 7월 미 하원이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기여했다.
유족으로는 중국에 사는 아들 소군화(농업) 씨와 딸 소수금(교사) 씨가 있다. 남편은 1996년 81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지 할머니 유해는 강원 인제군 하늘공원에서 화장된 뒤 나눔의 집 법당에 안치됐다.
나눔의 집은 3·1절인 다음 달 1일 나눔의 집 법당에서 추모제를 열기로 했다.
지 할머니의 별세로 나눔의 집에는 김군자(82) 할머니를 포함해 군 위안부 피해자 8명이 남았다.
광주=남경현 기자 bibul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