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참새소리 이 가지 저 가지에서 분주하구나. 이것으로 천만 년 이래의 하루가 온전하다.
이렇게 어제 오늘의 삶을 이어 온다.
저 1960년대쯤 서울역에서 목포까지의 완행열차 비둘기호는 가다가 서고 가다가 서고 목적지는 더욱 아득하기만 했다. 그런 열차를 타 보고 나서 인생을 새삼 알게 되었던가.
대구에서 서울까지는 야간 급행열차로 7시간이나 걸렸다. 요즘 서울∼대전 고속철도는 1시간 안팎이다. 머쓱하다.
기차여행은 옆 좌석과의 말문이 트이기 일쑤이다. 뜻밖에 오랜만의 친구도 만나게 된다. 며칠 전 강연하고 돌아오는 길에 10년 만의 친구를 만났다. 그가 들려준 얘기가 인상 깊었다.
미국 동부 어느 대학 생물학 교수가 작은 네모 상자에 모래를 담아 거기에 라이보리 한 놈을 재배하는 실험을 했다. 날마다 물을 주었다. 3개월 뒤 거기에서 물만 먹고 싹이 자라나 열매를 달았다. 수분밖에 없었으니 이파리인들 빛깔이 진할 리 없고 열매도 푸짐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만큼 되기까지 얼마나 뿌리가 내렸는가를 알기 위해서 상자를 떼어 내고 모래를 헤쳐 보았다. 잔뿌리가 아주 많았다. 솜털 비슷한 것은 현미경으로 계량했다.
그 3개월간 사방 30cm, 깊이 50여 cm의 상자 안에서 뻗어 내린 뿌리 길이를 환산해 보니 무려 1만1200km나 되었다. 거짓말 같았다.
기껏 한 줄기 곡식 초본(草本)인데 거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뿌리가 이렇게 엄청난 길이다. 그 네모진 상자 안에서 영양분을 필사적으로 찾아내야 하는 그 기나긴 뿌리의 헌신적인 역할이야말로 한 생명의 숨은 바탕이었다. 수분을 비롯한 철분 칼리 인산 등을 모래 속에서 빨아내어 줄기와 이파리와 열매를 만들어낸 것이다.
한 알갱이의 라이보리나 밀이 이런 뿌리라는 지하의 어머니 없이는 이 세상에 있지 못한다.
그렇다면 한 인간의 생존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공이 들여져야 하는가. 한 사람의 생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종류의 역할이 바쳐져야 하는가.
나. 나 하나의 생. 이것이야말로 온 사회, 온 세계, 온 우주의 치열한 은혜의 무궁(無窮)으로 가능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내 일생은 도저히 갚을 길 없는 은혜의 부채 아닌가. 무섭다.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다.
다급한 장끼가 제 모가지만 검불 속에 처박는 광경이 어찌 꿩 노릇에만 해당되는가.
오랜만의 친구와 종착역에서 헤어지며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밤의 네온사인은 어둠이었다.
자 여기 걸터앉자꾸나. 내가 말할 테니 네가 들어라. 네가 말하면 내가 듣겠다. 그러노라면 말하기보다 듣는 일이 더 숭고해지는 것을 어느새 알게 되리라.
세상의 모든 장광설이란 얼마나 천박하고 야박한가. 입보다 귀에 평화가 있다. 사랑이 거기서 시작한다. 프랑스의 다변(多辯) 수사학은 이따금 벼락 맞을 일이다.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말하기와 듣기가 함께 이루어지는 것, 일러 설청동시(說聽同時)인 것. 이 경지에 이르러서 누가 입이고 누가 귀인가.
서정의 행운은 사막의 꽃에 물이 닿는 것. 시멘트 벽 틈에서 개밥풀의 목숨이 자리 잡는 것. 서정의 불운은 모순이 모순인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그것을 알려 하지 않는 것. 서정과 모순 비판은 지상의 인간에게 불가피한 친자(親子)의 정신적 상속권이다.
배운다는 것은 일방적인가. 가르친다는 것도 일방적인가. 배움은 가르치는 사람을 가르치기도 한다. 가르침은 배우는 사람으로부터 배우기도 한다. 아니, 배운다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그 가르침을 자기 자신이 배우는 일이 된다.
저 라틴아메리카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실천교육론이 아직은 낡은 것 아닌 바,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로부터 배우고 배우는 자가 가르치는 자에게서 자신이 내일 알아야 할 것을 오늘 알게 되는 상호교육정신 때문이다. 문맹자와 문자 해독자의 차이는 언젠가 사라진다. 학생과 교사의 궁극적 한계도 언젠가 없어진다.
제삿날 밤 제상 복판에 모신 지방에는 평면의 경우 으레 현고학생부군 현조고학생부군의 ‘학생’이 있다. 여자는 유인(孺人)이니 이것도 학생 냄새가 난다. 나는 주자가례(朱子家禮)적인 이 ‘학생’에 다른 뜻 하나를 보내고 싶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배운다는 평생교육론을 넘어서 심지어 죽은 뒤의 망령으로도 영원한 학생이라는 뜻 말이다.
오늘도 나는 가르치는 자이기보다 배우는 자의 축복 속에 있다. 한갓 버러지로부터 배우는 것이 없을진대 스승 100명을 두어 무엇 하랴.
근대의 제도교육 밖의 세상, 저 모퉁이길 돌멩이한테도, 항공기 안에서 내다보이는 구름바다한테도 내가 배워야 할 것은 정녕 엄연하다.
이반 일리치가 왜 그리도 학교와 병원을 부정했던가. 나 또한 학교가 교사와 학생을 구별해 놓는 것이 교육의 첫 맹점이라고 여길 때가 있다.
나는 고대와 근세의 어떤 무사승(無師僧)을 알고 있다. 사자(師資)의 상속으로 굳어진 승려 사회에서 그것은 이례(異例)이다.
어쩌면 스승의 행복보다 스승이 없는 불행이 내 삶의 자발적인 정진을 다그친 것은 아닌가.
내가 살고 있는 사회 각계에 꽉 찬 도제 관계의 발호는 또 하나의 학연 작폐인 것 누가 모르랴.
유교의 군사부(君師父) 논리는 왕권 부권 그리고 사장(師匠)의 절대화로 세상을 지배하는 규범이 된다. 스승의 그림자 밟지 않는다는 옛 계율은 사라졌으나 교사의 기득권 안에 세상이 속해야 하는 현실의 굴레는 아직도 집요한 것이 사실이다.
스승이란 제자의 떡잎이다. 결코 제자의 꽃도 열매도 아니다.
아 진리 앞에서 안회한테 공자는 없다. 가섭 아난이 석가의 가섭 아난이라면 죽음이다.
고은 시인·서울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