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도로에서 발생하는 조급함과 서두름의 박자는 일상으로까지 옮겨 갔다. 사람들은 근로 시간 중에 서두르는 습관을 받아들여 점차 이를 내성화했다. 경제 발전이라는 폭풍 속을 질주하면서 생활의 리듬도 바뀌었다. 더욱 빨리 달리는 시간은 사람들의 생활을 채워 가면서 삶을 집약적인 것으로 변하게 했다.”
‘템포’라는 바이러스는 범지구적 감염체다. 19세기 말만 해도 2분의 1초 동안 12장의 사진을 찍었다고 놀라워했다. 하지만 겨우 100년 사이, 지금은 1000조분의 1초(1펨토초)까지 계산한다. 멈추지 않는 폭주기관차. ‘속도란 인간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악마’(터키 속담)다.
‘템포 바이러스’는 그 유혹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독일 마르부르크대 교수인 저자는 독일을 포함한 근대 유럽을 기점으로 속도의 변신 과정을 살핀다. 사회 경제 스포츠 예술 등 전 영역에서 인간이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 가는지를 둘러본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이 처음부터 속도에 매달린 건 아니었다. 중세만 해도 빠름은 오히려 해악이었다. 시간은 자연이 관장했다. 닭이 울고 해가 지는 템포에 인간이 맞췄다. 일부러 느림을 조장하기도 했다. 도로를 방치해 역마차가 속도를 못 내게 했다. 그래야 마을에서 숙식과 마차 수리로 돈을 버니까.
시간의 가치에 먼저 눈뜬 건 다름 아닌 상인들이었다. 한정된 시간 안에 더 많이 생산하는 방식을 개발했다. 더 많은 재화를 실어 나르기 위해 도로와 항로를 개선했다. 경쟁자보다 앞선 정보 획득을 위해 빠른 역참제도를 활성화시켰다.
상인들에게 화답한 건 정부였다. 지역경제에서 국가경제로 바뀌던 시점, 중앙정부는 안정된 수입을 원했다. 경제가 살아야 세금도 더 걷히는 법. 도로와 철도, 우편망을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활발한 상업 활동을 위해 빠르고 강한 군대를 키워냈다.
“산업화는 생산 운송 재화의 분배와 소비를 시간이라는 하나의 추상적인 원칙 아래 통합시켰다. 시간을 단축하는 기계와 기술로 생산을 가속화했으며, 운송의 가속화를 거쳐 소비의 가속화에 이르렀다. 산업화는 참여하는 모든 이에게 시간과 새로 교류하도록, 그리고 경제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변한 시간을 경제의 재화로 이용하도록 촉구했다.”
하지만 영원히 행복을 보장할 것 같았던 속도는 점차 이빨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전화는 최상의 정보 전달을 보장했지만 전화교환원을 정신병에 시달리게 했다. 쾌속의 자유이동 매개체인 자동차는 사고로 인명을 앗아갔다. 그리고 국가의 무기경쟁은 극심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속도가 증가하자 (인간의) 정신을 망가뜨리는 분주함도 최고조에 달했다.”
깨알 같은 글씨에 방대한 분량이지만 책은 잘 읽힌다. 다소 독일 중심적이긴 해도 오히려 영미권을 벗어난 시각이라 신선하다. 굳이 속도가 아니어도 유럽 근대 문화사로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이 책은 현실을 반영하기에 울림이 크다. 현대인은 이미 속도의 노예가 아닌가. 컵라면 익는 시간 3분을 못 참고 몇 번을 들여다보고, 겨우 몇십 초 느린 인터넷 속도에 짜증부터 내는 우리 모습. 1분 1초 단위로 무엇인가를 재촉하는 그 메커니즘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속도의 지배를 벗어난 삶은 요원할 듯하다. 원제 ‘Das Tempo-Virus’(2003년).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