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스 대신 태극기 들고 독립운동…醫師들은 義士였다

  • 입력 2008년 2월 29일 02시 56분


1944년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해방협동당에 가입해 활동했던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들이 지난해 6월 서울대병원에서 만났다. 왼쪽부터 권이혁 김교명 이상일 임광세 씨. 이들 중 김 씨와 임 씨는 옥고를 치렀다. 사진 제공 서울대병원
1944년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해방협동당에 가입해 활동했던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들이 지난해 6월 서울대병원에서 만났다. 왼쪽부터 권이혁 김교명 이상일 임광세 씨. 이들 중 김 씨와 임 씨는 옥고를 치렀다. 사진 제공 서울대병원
■ 의협 100주년 기념 조사 보고서

“의사로서 안정된 삶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조국의 독립이 더 중요했던 거요. 의사이기 이전에 ‘대한제국의 국민’이란 의식이 강했습니다.”

서울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으로 1944년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해방협동당에 참가했던 권이혁(85) 전 서울대 총장은 “일제 치하에서 손에 메스 대신 태극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펼친 의사와 의대생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권 전 총장은 문교부, 보건사회부, 환경처 장관 등을 지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그는 “활동조직이 일본 경찰에 노출돼 한동안 피신을 다녔다”면서 “체포된 다른 동기들은 고문을 받는 등 심한 옥고를 치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일제강점기 한국 의사의 상당수가 편안한 삶을 거부하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의사협회가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조사한 ‘의사 출신 독립운동가의 활동과 역사적 위상’ 보고서를 단독 입수해 분석한 결과 1907∼1945년 독립운동에 가담한 의사와 의대생은 총 156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1940년 기준으로 의사 면허를 가진 한국인 1918명 중에서 8%가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으로 의사들의 독립운동 활동상에 대한 보고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156명 중 67명은 대통령표창, 건국훈장, 건국포장 등 독립유공 포상을 받았지만 권 전 서울대 총장 등 89명은 미포상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책임자인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는 “보훈처와 동아일보 등의 각종 독립운동 자료 분석을 통해 총 6만 명에 달하는 독립유공 포상자와 미포상자를 찾은 뒤 의사, 의대생 출신의 독립운동 업적을 추적했다”고 말했다.

포상자는 경성의전 20명, 세브란스의전 11명,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경성의전 전신) 3명 등의 순으로 많았다. 평양의전 2명, 경성제대 의학부 2명,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고려대 의대 전신) 1명, 대구제중원 의학당 1명 등이 뒤를 이었다.

미포상자는 경성의전 39명, 세브란스의전 18명, 경성제대 의학부 12명 순이었다.

시기별로 보면 1910년 한일병합 직후에는 만주, 몽골, 러시아, 연해주, 상하이 등지에서 독립군기지 건설에 참여하는 등 주로 항일투쟁의 일선에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에서는 경성의전, 세브란스의전 학생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에는 주로 독립군을 치료하는 군의관으로 활동했으며 국내 의학교 출신뿐 아니라 상하이와 항저우 지역 의학교를 졸업한 의사들도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다는 것.

김 교수는 “포상 기준에 약간 못 미치거나 활동상을 입증할 자료를 찾기 어려워 미포상자가 많지만 이번 기회에 의사 출신 독립운동가의 공적이 제대로 인정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현재 독립유공 포상자 최소 기준은 6개월 이상의 독립운동 활동 또는 이 때문에 3개월 이상의 옥고를 치른 경우로 규정하고 있다.

주수호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독립운동 의사들의 참다운 희생정신이 오늘날 의사들의 사회봉사 의식은 물론 민족정신 고양에도 큰 영향을 줬다”며 “선배들의 활동상을 발굴하는 데 역점을 두겠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軍醫로 비밀요원으로 세계 곳곳서 ‘항일’

■ 독립운동 의사들

일제 치하에서 한국 의사들은 만주, 몽골, 독일, 미국, 러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제중원 의학교 출신인 김필순(1878∼1919)은 만주와 네이멍구 지역을 누비며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했다. 그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후 일본군과 맞서 부상병을 돌봤으며 1911년 만주로 망명길에 올라 서간도, 베이징을 거쳐 몽골 인근 치치하얼 지역에서 병원을 세워 독립운동 기지로 삼았다.

이태준(1883∼1920)은 세브란스의전 출신으로 러시아와 중국을 오가며 비밀연락원 역할을 수행했다. 1920년 레닌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200만 루블을 지원하기로 약속하자 비밀리에 자금을 운송했으며 베이징에서 의열단에 가입한 후 폭탄 제조 전문가를 의열단에 소개하기도 했다

이자해(1893∼1960·출신 의대 미상·사진)는 중국 북부 지역의 광복군 교두보를 만들었다. 그는 1937년 백범 김구 선생의 부탁으로 네이멍구 바오터우 시에서 중국군 제18기병연대 야전병원장을 맡아 중국 북부 지역 한인 청년들을 광복군으로 보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상하이 동제대 의과 출신인 유진동(1908∼미상)은 1933년 한국독립당원,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원,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군의처장으로 활약하며 임시정부 요인들을 돌봤다.

중국 저장 성 성립 항저우의전을 졸업한 신건식(1889∼1963)은 단재 신채호 선생과 함께 상하이 최초의 독립운동 조직인 ‘동제사’를 결성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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