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계곡물 흐르는 건물… 명화가 된 가림막

  • 입력 2008년 2월 29일 03시 10분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여러분, ‘서울 갤러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코 묻은 다섯 살 꼬맹이의 스케치북 그림부터 벨기에 출신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까지 모두가 ‘예술’이 되는 공간이죠.

이제부터 여러분이 관람할 작품은 건물, 그리고 공사장 가림막입니다. 때로는 비를 맞으며, 때로는 무더위와 싸우는 도심의 건물과 가림막은 어느덧 우리에게 예술이 됐습니다. 605.33km²의 넓은 공간, 연중무휴를 자랑하는 서울 갤러리의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예술이 된 서울, 그럼 하나씩 둘러볼까요? 》

○ ‘예술’ 옷으로 갈아입은 건물

“쩍” 갈라지는 소리만 들리지 않을 뿐이다. 건물을 가르고 나타난 계곡. 그 사이로 풀이 자라났고 계곡이 흐르는 소리가 ‘졸졸’ 들린다. 건물을 가르고 계곡이 나타난 이 파격적인 건물은 바로 주택문화관이다.

18일 문을 연 대우건설의 ‘푸르지오 밸리’는 강남구 역삼동 강남역 한복판에 자리 잡았다. 퇴적층 모양의 건물 사이에 계곡이 흐르는 듯한 형상의 이 건물은 자연과 예술, 그리고 건축을 하나로 모아놓았다. 이를 설계한 한양대 장순각(실내환경디자인학) 교수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공간인 만큼 주택 전시장의 개념보다 문화 공간으로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1층에는 카페, 그리고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해 놓은 ‘갤러리 카페’도 마련해 놨다. 옆 동네인 논현동으로 넘어가면 상자 여러 개로 만든 듯한 건물이 시선을 끈다. ‘제7의 천국(7th Heaven)’이라는 이름의 이 건물에는 ‘덧니’, ‘하울의 움직이는 성’, ‘박스 빌딩’ 등 별명만 수십 개가 넘는다. 수많은 상상력을 안겨다 주는 이 건물에는 이른바 ‘민주주의 문화’가 담겨 있다. 건물을 설계한 건축사무소 ‘시건축’의 류재은 소장은 “입주자들의 다양한 개성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했다”고 말했다. 이 건물은 지난해 제25회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받았다.

이제 건축가에게 ‘건물=네모 반듯’이라는 공식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들은 미술가, 디자이너 등 예술가들과 협업해 예술품을 만들고 있다. 청계천9가에 위치한 ‘서울문화재단’은 재건축 당시 설치예술가 최정화 씨가 디자인에 참여해 ‘회색 공장’ 건물로 재탄생시켰다.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앞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는 프랑스 출신의 여류 아티스트 르나 뒤마가 디자인을 맡아 화제가 됐다. 또 중구 을지로 1가에 있는 ‘삼성화재’ 건물은 협성대 시각디자인학과 정규상 교수가 참여해 낮에는 우리나라의 전통 보자기인 ‘조각보’를, 밤에는 ‘알파네온’ 모자이크 예술품 ‘메트로 폴 50’을 만들었다.

○ 무한 스케치북, 가림막

철골 콘크리트 뼈대, 뿌연 먼지로 대표되는 공사장과 예술이 만나면?

바로 ‘아트 펜스(Art Fence)’의 세계가 펼쳐진다. 2005년 중구 충무로 신세계백화점 본점 내부 리모델링 공사 현장에 르네 마그리트의 1953년 작 ‘골콩드(Golconde)’ 가림막이 설치됐다. 지난해 말 광화문 복원 현장에는 설치미술가 강익중 씨가 나무합판 2616개를 붙여 만든 가림막 ‘광화문에 뜬 달’ 등 쇳소리 나는 삭막한 공간이 바뀌고 있다. 최근에는 종로구 신문로에 펼쳐진 ‘옴니버스 미술전’이 각광받고 있다. ‘금호아시아나’ 제2사옥 건설현장 가림막에 서양화가 우제길 씨의 ‘88-12A’ ‘판화’ ‘하늘’을 비롯해 색채화가 이영희 씨의 ‘근원’ 하인두 화백의 ‘구성’ 등 작가 4명의 작품 7점이 전시되고 있다. 미술품을 아예 외벽에 붙인 경우도 있다.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점 건물에는 프랑스 출신 ‘누보 팝’ 작가 필리프 위아르의 작품 ‘소 왓(So what)’이 걸려 있고 29일까지 백화점 내 갤러리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린다.

○ 건물에 입주하지 않는다, 예술 공간에 살 뿐이다.

건축가 겸 국민대 장윤규(건축학) 교수는 “건물을 건물처럼 짓지 않으려는 이 같은 시도는 건축과 예술이 만난 하나의 ‘크로스오버’ 문화”라고 말했다. 과거 근대화, 개발시대 때 가장 적은 비용으로 효율성을 살리기 위해 ‘사각 박스’ 지상주의를 주장했던 건축계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사회가 다원화되고 문화가 강조되면서 그간 잊고 있던 미학이 삶과 건축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아트 컨설팅회사 ‘더 톤’의 윤태건 대표는 “앞으로는 단순히 건축에 예술이 포함된 형태를 넘어서 새로운 개념의 예술 건축들이 도시를 수놓을 것”이라며 “건축가와 예술가들의 지속적인 협업이 이어질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건물 ‘입주’가 아닌 갤러리 ‘관람’ 개념인 셈이다. 그곳은 공짜 갤러리, 바로 서울이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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