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잔혹한 현실로 희망을 안고 떠나다…‘그래서 우리는 떠났어’

  • 입력 2008년 3월 1일 03시 01분


◇ 그래서 우리는 떠났어/지빌레 베르크 지음·구연정 옮김/288쪽·9800원·창비

“내가 벌써 이야기했던가?” 안나는 말한다. 이곳은 춥다고, 엄마가 길바닥에 자주 쓰러진다고, 친구란 필요 없다고. 그러면 막스가 말한다. 여름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밖으로 나가는 게 대안은 아니라고, 밤은 쏜살같이 지나간다고.

이 이야기의 배경은 통일 전 동독이다. 열세 살의 안나와 막스에게 이곳은 늘 춥다. 이혼하고 문란하게 사는 술주정뱅이 안나의 엄마, 아들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걸어주지 않는 막스의 냉정한 아빠 때문이다. 여기에다 엄격하기만 한 학교 교육도, 우울한 동독의 현실도 어린 소년 소녀들이 마음껏 꿈꾸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안나와 막스는,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밖으로 나가기로 한다.

“문학적으로 삶을 구원하고 폭탄처럼 터질 듯한 문장으로 눈부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코미디언”(쥐트도이체 차이퉁)이라는 평을 받는 독일 작가 지빌레 베르크(46). 동독에서 나고 자랐지만 스물두 살 때 서독으로 옮겨 와 살게 된 경험이 이 장편에 담겨 있다.

작가는 안나와 막스의 육성을, 장(章)을 교차하면서 전개하는 한편, 문학적이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언어로 문장을 직조한다. 술에 취한 안나의 엄마를 도와준 것을 계기로 안나와 막스는 우정을 나누게 되고, 답답하고 우울한 동독을 ‘함께’ 탈출하겠다는 꿈을 품는다. 그렇게 안나와 막스가 나온 바깥 세계는 무시무시하기 그지없다. 폴란드와 헝가리, 불가리아 같은 동유럽 곳곳을 다니지만 그곳도 여전히 춥다. 심지어 잔인하다. 둘은 아이들을 공장에 팔아넘기는 인신매매 부부에게 잡히고, 어른들에게 혹사당하고, 같은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구해주기 위해 어른들과의 싸움도 감행한다.

이 ‘잔혹 동화’는 단순히 동서독을 비교하는 얘기가 아니다. 꿈을 가진 사람들이 이 폭력적인 세계를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작가는 소년 소녀의 유랑을 통해 보여준다. 그러나 작가는 세계에 대해선 절망하지만, 사랑에 대해선 믿음을 건다. 손잡고 가는 막스와 안나에게 동지애를, 막 시작되는 사랑을 불어넣어 둘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힘이 되게 한다.

동화 속 주인공들처럼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면 좋겠지만, 실제의 삶은 그렇지 않다. 안나와 막스가 터키행 배를 타는 것으로 소설은 끝나지만, 둘은 여전히 불안하다. 그래도 “뭐든 우리가 떠나온 곳보다 나을 것”이라고 둘은 믿는다. 그것은 ‘희망’의 다른 표현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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