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오전 9시(현지 시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필립스’ 본사 회의실.
수십 개의 파란 눈은 ‘면도기 여인’ 변다미(31) 씨에게 향했다.
새로운 전기면도기에 대한 디자인, 마케팅, 영업 등 릴레이 회의가 있던 이날 변 씨는 수많은 외국인 사이에서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섰다.
국내 대기업에서 디지털기기 디자이너로 활동한 그는 지난해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며 네덜란드행 비행기를 탔고 1년 만에 남성 전기면도기를 만드는 아시아 최초의 여성 디자이너가 됐다. 그러나 그는 남성의 전유물인 ‘면도기’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소비자 조사를 해보니 여성들이 선물용으로 남성보다 면도기 구입을 더 많이 하더라고요. 이제는 여성들의 구미에 맞게 디자인하는 것이 ‘대박 면도기’의 조건입니다.”
○ 대부분 자원자… 업무에도 적극적
“제모 느낌과 감촉을 알기 위해 유사시에는 아예 다리털과 팔털을 깎기도 한다”는 변 씨. 남성을 연구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관심사도 자연스레 바뀌었다.
모터사이클부터 제트스키, 스피드보드까지 역동적이고 남성미 넘치는 분야를 찾아다니고 있다.
그가 남성 면도기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특별함’ 때문이다. 변 씨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섞어 새로운 디자인을 만드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경험” 이라고 말했다.
남성의 유행을 만드는 여성, 여성의 유행을 이끄는 남성. 이른바 ‘콘트라 리더’들은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남자 간호사, 남자 네일아티스트, 여성 경호원 등 직업의 성벽이 무너진 ‘크로스 잡’ 시대에 이어 나타난 현상으로 이들은 서로의 성을 연구하며 사회 전반의 흐름을 주도하는 주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자원자’의 성격을 띠며 업무에서도 적극적이다.
이는 회사의 전략으로 평가받고 있다. ‘수세미’ 마케터인 ‘한국 쓰리엠’의 생활용품팀 백경(30) PM은 “여성 물품은 남성 물품에 비해 시시각각 기호가 변하므로 이를 감지하고 꾸준히 연구하기 위해 남성의 추진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생활용품팀은 10명 중 절반이 남성 마케터다.
이들은 모든 여성 잡지를 독파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부 아침 드라마, 심지어 대형마트에서 여성 고객들이 쇼핑하는 이동 경로까지 연구하고 있다.
○ 콘트라 리더가 만든 제품 긍정적67%
콘트라 리더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어떨까?
본보가 인터넷 쇼핑몰 ‘G마켓’과 함께 누리꾼 226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먼저 콘트라 리더의 이미지에 대해 전체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59.5%가 ‘사회가 다양하게 발전하려는 움직임’이라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전적으로 찬성한다’라는 응답도 23.2%나 됐다. 이는 ‘대중적이지 않다’(12.7%), ‘옳지 못하다’(4.6%) 등의 부정적인 의견보다 4배나 많았다.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는 ‘남성의 추진력과 여성의 섬세함이 모든 분야에 요구되는 사회’(43.1%)가 1위로 꼽혔고 ‘나’를 표현하는 것에 익숙한 1990년대 ‘X세대’가 현재의 2040 세대로 변모했기 때문이라는 응답도 29.8%로 2위였다.
콘트라 리더가 만든 제품을 사거나 이들의 사회적인 움직임에 동참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적극 검토해 보겠다’(42.5%)는 긍정적 반응이 많았다. ‘관심은 있지만 선뜻 구매하기 어렵다’(25.6%)는 응답과 ‘물론이다. 기존 물건보다 기능이 더 뛰어날 것 같다’(24.5%)는 절대적 찬성이 근소한 차로 2, 3위를 차지한 것도 흥미롭다. 놀라운 것은 10대들이었다. ‘선뜻 구매하기 어렵다’고 응답한 10대가 35.3%로 기성세대보다 보수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서는 ‘유행 자체가 중성적으로 변모해 나갈 것이다’(41.6%), ‘개념이 정착화돼 남성성 여성성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36.6%) 등 콘트라 리더가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 효율의 시대 vs 직업 성취욕
전문가들은 신제품이나 유행에 있어서도 성벽이 무너지고 남성 전문가인 여성, 여성 전문가인 남성이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감성’의 발달을 꼽는다. 과거 산업사회가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을 이성적으로 철저히 분리시켰다면 감성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어느 분야에서든 ‘대박’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화여대 문숙재(소비자학) 교수는 “정보화 시대에 사람들이 남성과 여성을 분리하는 것이 더는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콘트라 리더들은 스스로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분야를 찾아 나선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현상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한국트렌드연구소의 김경훈 소장은 “현재 콘트라 리더들은 성의 파괴가 아닌 ‘직업 프런티어’로서 스스로의 성취욕을 위해 행동하는 경향이 크다”고 말했다. 진정한 사회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몇몇의 화제가 아니라 성 연구가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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