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진은숙 씨 새작품 ‘로카나’ 뉴욕 초연
“한국 작곡가 진은숙이 뉴욕의 ‘로카나’ 초연무대에 함께해야 하는데 눈보라 때문에 이제야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빛의 공간’을 음악으로 표현한 그가 ‘눈의 공간’에 갇혔네요. 음악회가 끝나기 전에 이 자리에 왔으면 좋겠군요.”(지휘자 켄트 나가노)
8일 미국 뉴욕의 날씨는 종일 변덕스러웠다. 마천루는 구름에 휩싸여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고, 택시 안에서도 비바람의 힘이 느껴질 정도였다. 오후 8시 카네기홀에서는 재독 작곡가 진은숙(47·서울시향 상임작곡가)이 뉴욕의 날씨만큼 변화무쌍한 현대 음악 ‘로카나’로 뉴욕 데뷔 무대를 가졌다.
나가노가 지휘하는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이날 공연에서 2800여 객석이 매진됐다. 미남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 1부에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데 이어 진은숙의 20분짜리 관현악곡 로카나가 2부 첫 곡으로 연주됐다.
산스크리트어로 ‘빛의 방’이란 뜻의 로카나는 진은숙이 아이슬란드 작가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설치미술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곡. 천장에 달린 대형 거울과 바닥의 물에 비친 빛이 영사기를 통해 반사, 굴절, 투영되는 모습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진은숙은 강렬한 금관악기와 글로켄슈필, 마림바폰, 유리종 등 타악기를 이용해 천둥번개 폭포와 같은 격렬한 소리를 표현해냈다. 모든 음이 하나로 모여 레이저 광선 같은 느낌을 주다가, 한순간 프리즘을 통과한 듯 무지개처럼 퍼지는 피날레는 압권이었다.
로카나는 서울시향과 몬트리올 심포니, 뮌헨 바이에른 오페라, 베이징 음악축제재단 등 4개 단체가 진은숙에게 공동 위촉한 작품. 지난해 독일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의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세계 초연된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후 나온 진은숙의 신작이었다. 진은숙은 2001년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음악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그라베마이어상’을 받은 뒤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다.
음악회가 끝나고 1시간 뒤에야 도착한 진은숙은 “시카고에서 뉴욕까지 18시간이 걸렸다”며 “(나는) 카네기홀에서 데뷔 무대를 보지 못한 첫 작곡가일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는 “지난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후 공허함에 빠졌는데 이번 작품은 영감을 받자마자 9주 만에 완성했다”며 “빛과 음악은 똑같은 파동이며, 순간적으로 색깔이 변한다는 점에 착안했다”고 설명했다.
진은숙은 바이올린 협주곡,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자신의 대표작을 초연해 온 지휘자 나가노에게 이 곡을 헌정했다.
나가노는 “그동안 진은숙의 작품은 주로 성악이나 솔리스트의 협연곡이었는데 이번 곡은 오케스트라를 위한 수준 높은 작품”이라고 평했다. 로카나는 4월 시카고 심포니도 연주할 예정이며, 서울시향도 아시아 초연을 준비 중이다.
뉴욕=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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