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은 한글 제목, 대박 외화 만들더라

  • 입력 2008년 3월 25일 03시 00분


《한국 영화 개봉이 줄면서 외국 영화가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수입 외화는 404편으로 그 전 3년간 매년 250∼280편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 3월 들어 지금까지 개봉한 한국 영화는 3편에 그쳤지만 외화는 20여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외화 직배사나 수입사의 고민은 원제를 한국어 제목(한제)으로 잘 바꾸는 것. 홍보대행사 올댓시네마의 김태주 팀장은 “예전엔 제목을 통해 ‘영화적인 느낌’을 전달하려고 했지만 요새는 외화가 너무 많아 관객에게 쉽게 각인시키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한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원제를 그대로 한글로 음차 혹은 직역하거나 △원제를 설명하는 부제를 붙이는 방식 △새로운 한국어 제목을 짓는 경우 등. 최근 외화들을 통해 ‘원제와 한제 사이’를 들여다봤다.》

○ 원제를 지켜라

지난 5년간 외화 흥행 순위 톱 10에 든 영화 중 원제를 의역한 제목은 ‘박물관이 살아있다’(2006년)뿐이다. ‘박물관의 밤(Night at the museum)’이라는 뜻의 원제를 내용에 맞춰 잘 바꾼 성공 사례다. 경쟁 직배사의 관계자가 “듣자마자 ‘게임 오버’라고 생각했다”고 말할 정도로 잘 지은 제목이다. 이만한 의역이 아닐 바에야 원제를 고수하는 경향이다.

네스 호에 사는 괴물과 한 소년의 우정을 다룬 영화 ‘워터 호스’(상영 중)는 “‘물 뿌리는 호스’라는 인상을 줄 것 같아 걱정도 했지만 어중간한 의역보단 원제가 낫다고 생각해 그대로 썼다”는 게 배급사인 소니픽쳐스릴리징 측의 설명.

원제를 살릴 때도 예전엔 중학생 수준의 영어 단어만 썼으나 최근엔 그런 금기가 사라졌다. ‘대통령 저격’이라는 한 사건을 여러 사람의 시점에서 다룬 ‘밴티지 포인트(Vantage point·상영 중)’는 ‘최적의 관점’이라는 뜻이다. ‘밴티지’에 대한 지적이 많았지만 적절한 한국어 제목이 없어 그대로 개봉했다.

지난달 개봉했던 ‘3:10 투 유마’는 원제를 그대로 사용했다가 제목 마케팅에서 실패한 사례. ‘3시 10분 유마행 열차’라는 뜻의 이 영화는 신선한 서부극이라는 평을 받았지만 흥행 성적은 좋지 않았다. 수입사 마스엔터테인먼트의 김은경 상무는 “사람들이 무슨 뜻인지는커녕 어떻게 읽어야 할지조차 몰랐다”고 말했다.

최근엔 인터넷 검색 상위에 오를 수 있도록 ‘검색하기 쉬운 제목인가’가 중요하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의 남윤숙 이사는 “상영 중인 ‘10,000 BC’의 경우 ‘만 비씨’ ‘만 BC’ 등 여러 검색어로 분산되는 바람에 검색 순위가 올라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 원제를 설명하라

원제가 어렵거나 뜻이 모호할 때는 단어를 생략하거나 부제를 붙여 제목을 설명한다. 27일 개봉하는 ‘데스 디파잉-어느 마법사의 사랑’은 ‘죽음을 불사하는 행동(Death defying acts)’이라는 원제에서 한 단어를 빼고 부제를 붙여 로맨스 영화라는 점을 강조했다.

4월 9일 개봉하는 잭 니컬슨 주연의 ‘버킷 리스트-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The bucket list)’도 원제의 뜻을 설명해 주는 부제를 붙였다. 축구하는 소녀의 이야기인 ‘그레이시 스토리’(상영 중)는 원제인 소녀의 이름 그레이시(Gracie)에 ‘스토리’를 추가해 실화라는 점을 강조했다.

최근 종영한 ‘27번의 결혼 리허설(27 dresses)’은 주인공이 신부 들러리만 27번을 해 들러리 드레스가 27벌이라는 내용을 제목에 나타내기 위해 원제를 살짝 바꿨다.

○ 원제를 뒤집어라

1990년대 후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히트 이후 긴 한국어 제목이 늘어났다. 2004년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등 잘 지은 긴 한국어 제목이 유행하며 절정을 이뤘고 요즘도 로맨틱 코미디는 톡톡 튀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 긴 제목을 선호한다.

4월 9일 개봉하는 라이언 레이놀즈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나의 특별한 사랑이야기’의 원제는 ‘물론이지, 글쎄(Definitely, maybe)’다. 3번의 사랑 뒤 진정한 사랑을 찾는 남자의 이야기. 사랑에 대한 확신과 의심 사이의 갈등을 표현한 원제를 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상영 중인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의 원제는 ‘라스와 리얼 걸(Lars and the real girl)’. 주인공 라스의 여자친구는 ‘리얼 돌’(사람과 똑같은 모습의 인형)이지만 그에게만은 ‘진짜 여자 친구’라는 뜻이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2001년)나 ‘내겐 너무 아찔한 그녀’(2004년)를 연상케 한다. 수입사 측은 원제를 살려 ‘라스 씨의 여자친구’ 같은 제목을 고려했지만 더 일반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이렇게 바꿨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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