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맘 먹기까지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잇 백(It Bag)’을 사러 서울 강남구 청담동을 나선 직장인 채경희(27·여) 씨에게 잇 백의 실체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상점 A. “저희 잇 백은 ‘라인’ 자체가 다른 브랜드와 다르고 최신 유행을 접목해서….”
#상점 B. “형형색색의 이 가방 좀 보세요. 전 세계 한정 수량으로 제작됐고….”
#상점 C. “저희 가방은 할리우드 스타들도 없어서 못 멘다는 할리우드 잇 백….”
‘It's the Bag’. 그 시대 가장 인기 있는 바로 그 가방. 그것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패셔니스트’가 될 수 있는 마법의 가방. 또 다른 말로는 ‘패리스힐튼 가방’, ‘빅토리아 베컴 가방’ 등 파파라치 사진 속에서 스타들이 들고 다니는 ‘핫’ 아이템. 하지만 2008년 봄 패션계는 산만하다. 이들의 앞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 브랜드의 야심작’이라며 수백 개의 가방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여기도 잇 백, 저기도 잇 백, 모두가 잇 백인 지금, 너도나도 잇 백을 자처하지만 정작 시대를 꿰뚫는 진정한 잇 백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얘기한다. “잇 백은 죽었다”라고….》
○ 여러 스타일 고루 인기… ‘가방 춘추전국’
지난해 11월 미국 뉴욕타임스에 패션 가방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이거 잇 백 용인가요?(Is This It for the It Bag?)’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패션계에 넘치는 잇 백 현상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너도나도 잇 백을 자처하는 가방들이 늘어나고 이로 인해 가방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았다’는 내용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러한 잇 백을 ‘거품(Bubble)’이라 칭했고 곧 수그러들 것으로 내다봤다. 뉴욕 지역 신문인 ‘NY데일리뉴스’ 역시 비슷한 때 ‘잇 백이 아니라고 말해라(Say no to the ‘It’ Bag)’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외신들이 앞 다퉈 잇 백이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예측’만은 아니었다. 인터넷 쇼핑몰 G마켓이 지난해와 올해 1∼3월 같은 기간 가방 구입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지난해에는 ‘페이즐리 토트백’(4430건), ‘자물쇠 달린 숄더백’(4390), ‘링 클러치 백’(2470) 등 세 종류가 전체 가방 판매의 70%를 차지했다.
반면 올해 같은 기간에는 ‘샤넬2.55’ 스타일의 ‘퀼팅 체인백’(2900), ‘타이포그래피 캔버스백’(2400), ‘몬드리안(네모가 겹쳐진 디자인)백’(2200), ‘빈티지 스타일의 메시백’(1700) 등 5종류 이상의 다양한 스타일이 상위 70%를 차지했다.
G마켓 패션잡화팀 이유영 팀장은 “지난해까지는 유명 스타나 매체를 통해 잇 백으로 소개된 몇몇 스타일이 독주했으나 올해부터는 유행과 상관없이 골고루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최근 가방 시장은 ‘대세’라 불리는 몇몇 잇 백에서 벗어나 이른바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다.
○ 유행 대신 ‘개성’을 들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잇 백은?”이라는 질문에 갸우뚱하고 있을 사이 지금도 전 세계에서 수십 개씩 팔리는 가방이 있다. 바로 ‘아임 낫 어 플라스틱 백(I'm not a plastic bag)’ 가방이 그 주인공이다.
영국 출신 디자이너 애냐 힌드마치가 지난해 “비닐봉투 사용을 줄이자”며 환경 캠페인 일환으로 만든 이 가방은 흰 캔버스 천에 ‘아임 낫 어 플라스틱 백’ 문장 하나만 담긴 500개 한정판이다. 한 개에 15달러인 이 가방은 판매하자마자 매진되며 잇 백으로 떠올랐다. 국내 역시 정식으로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수백 개의 온라인쇼핑몰에서 매진되고 있다. 서울 중구 명동 노점 곳곳에서도 이 가방을 개당 2만5000∼3만 원씩 판다.
잇 백이 사라진 시대. 명품 위주의 잇 백에서 벗어난 소비자들의 새로운 흥밋거리는 바로 개성이다. 특히 올해에는 ‘친환경’, ‘재활용’ 등을 주제로 한 자연친화적 가방들이 눈에 띄게 많이 소개되고 있다.
차량용 안전벨트로 크로스 백을 만든 가방 전문 브랜드 ‘하비스’부터 화물차 덮개용 천 크로스 백을 만든 스위스 가방 브랜드 ‘프라이탁’ 등이 대표적이다. 식물성 천연염료인 ‘베지터블 오일’을 사용한 ‘루이까또즈’의 ‘코오스라인’도 화제다.
개성 위주의 가방 구매 현상은 한동안 잠자고 있던 ‘백 팩’도 깨웠다. 10년 전 학생 가방으로 인기를 얻은 ‘이스트팩’은 ‘질 샌더’의 수석 디자이너로 유명한 세계적인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와 함께 작업했고 ‘비아모노’는 신진 디자이너의 그림을 삽입한 가방을 발표하는 등 ‘예술 백 팩’으로 거듭나고 있다.
아예 고객이 직접 만드는 ‘MIY(Make It Yourself)’ 가방도 나타났다.
명품 브랜드 ‘펜디’는 올해 ‘디자인 유어 오운 백’이라는 캠페인 아래 하얀 캔버스 백을 바탕으로 자신이 직접 가방을 디자인할 수 있는 이벤트를 4월 한 달간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연다. 아시아 6개국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이 이벤트에 당첨되면 자신이 디자인한 가방이 다음 시즌 한정판으로 제작된다.
○ ‘패스트 패션’을 거부하는 시대
모두가 잇 백인 시대.
그로 인해 잇 백이 사라진 시대. 이는 루이비통 ‘모노그램 가방’부터 ‘샤넬2.55’ 가방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품 위주의 잇 백에 소비자들이 질렸기 때문이다. 가방 제조회사 ‘지구통상’의 한재석 대표는 “유행에 민감한 잇 백을 만들고 또 다음 시즌에는 폐기하고 새로운 가방을 만드는 등 ‘패스트푸드’ 같은 분위기에 소비자들이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주기가 짧아진 잇 백에 반기를 든 것은 업체들도 마찬가지다. 매시즌 새로운 주제의 가방을 만들고 남들과 다른 마케팅을 선보이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LG패션’의 액세서리 수석 디자이너 임지혜 실장은 “한때 폭발적인 반응을 얻기보다는 고유 디자인인 ‘시그니처 라인’에 유행을 접목시키며 브랜드의 정체성을 강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회용품처럼 돼버린 잇 백 시장의 부담은 고스란히 소비자 몫이다. 패션 홍보대행사 ‘오피스 h’의 황의건 대표는 “소비자들은 ‘잇 백 추종자=패션 팔로어’로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맞는 가방을 찾을 것”이라며 “브랜드들은 소비자를 잡기 위해 한정 수량의 ‘특별한’ 가방을 만들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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