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동서로 가르며 남북으로 흐르는 센 강. 그 강의 좌안(左岸)을 ‘레프트 뱅크(Left Bank)’라고 부른다. 프랑스어로 하면 리브 고슈(Rive Gauche)라고 한다. 레프트 뱅크는 20세기 초 문학 예술에 있어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의 진원지였다.
그 모더니즘의 주역들은 대개 남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학자인 저자는 이런 통념에 의문을 표한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
20세기 초 파리의 레프트 뱅크에서 활동했던 세계 각국의 여성 모더니스트 28인의 삶과 예술을 소개한 책이다. 시와 소설을 쓰고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렸고 책을 출판하고 서점을 운영했던 여성들.
레프트 뱅크의 모더니즘 여성 작가 가운데 두드러진 창작 활동을 벌였던 거트루드 스타인, 당시 아방가르드 잡지 ‘리틀 리뷰(Little Review)’를 창간한 마거릿 앤더슨, 서점을 운영한 아드리엔 모니에와 실비아 비치,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영감의 원천이자 프로이트의 분석 대상이었던 시인 힐다 둘리틀, 미모와 지성으로 수많은 남성을 사로잡았던 작가 주나 반스, 미국 잡지 ‘뉴요커(New Yorker)’에 칼럼 ‘파리에서 온 편지’를 연재했던 재닛 플래너….
이들은 왜 세계 각지에서 레프트 뱅크로 모여든 것일까. 그건 새로운 예술, 새로운 자유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두드러진 인물은 미국 출신의 거트루드 스타인. 그는 시도 소설도 희곡도 아닌 독특한 양식의 문학을 창작해 기존의 관습에 맞섰다. 같은 단어의 반복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추출해내려는 전위적인 시도였다.
스타인은 또 당시로선 무명이었던 피카소와 마티스를 주목했다. 특히 피카소의 작품을 구입해 지원하는 등 스타인이 없었다면 피카소 미술이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피카소는 스타인 초상을 그려줌으로써 이에 화답하기도 했다.
서점을 통해 문화 예술을 지원한 프랑스 출신의 아드리엔 모니에와 미국 출신의 실비아 비치도 눈에 띈다. 모니에는 1915년 레프트 뱅크에 서점 ‘라메종 데자미 데리브르(LA MAISON DES AMIS DES LIVRES)’를 열었다. 이곳으로 작가들이 모였고 그 가운데 앙드레 브르통, 폴 발레리, 기욤 아폴리네르, 앙드레 지드 등이 있었다. 그야말로 아방가르드 문학의 요람이 된 것이다.
비치는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를 연 인물. 음란하다는 이유로 누구도 출간하려 하지 않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출간해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1922년 ‘율리시스’가 출간됐을 때, 미국 작가 주나 반스는 ‘리틀 리뷰’에 이렇게 썼다. ‘이젠 한 줄도 쓰지 못할 거야. 이 작품 이후에 누가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라고.
1940년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레프트 뱅크의 여성 예술가들은 흩어졌다. 누군가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고 누군가는 레지스탕스 관련 책을 냈으며 하나둘 세상을 등지기도 했다. 스타인이 죽고 15년이 흐른 뒤, 한 동료는 재닛 플래너에게 엽서를 보냈다. ‘사랑하는 사람들… 파리와 프랑스적인 것이 아직도 나를 유혹해요.’
잘 몰랐던 20세기 초 파리에서 활동하던 여성 예술가들의 삶이 흥미롭고 감동적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