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제국’ 페르시아]<3>페르시아인들 경주를 활보하다

  • 입력 2008년 4월 5일 02시 55분


터번 쓴 서역의 8척 장수, 신라왕릉을 수호

실크로드 따라 골드 러시… 국제도시 경주로

용강 고분 서역인 문관상… 관직도 진출한듯

경북 경주 시내에서 울산 가는 길의 한적한 도로변에 있는 신라 괘릉(掛陵). 8세기 통일신라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 여기 있던 작은 연못에 왕의 유해를 걸어 놓았다고 해서 괘릉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 괘릉에 들어서면 무시무시한 풍모의 페르시아 사내가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다. 바로 페르시아인 조각상 한 쌍. 8세기 신라왕의 무덤 앞에 어떻게 페르시아인이 조각돼 있는 것일까.

○ 신라왕을 지키는 무시무시한 페르시아인

당시 신라 경주는 문물이 번창했던 국제도시였다. 그 명성에 걸맞게 멀리는 유럽의 로마, 페르시아에서부터 가깝게는 중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종의 외국인들이 드나들었다. 그 흔적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이 괘릉의 페르시아 무인상 2구(각 높이 257cm)다.

이 주인공이 페르시아인이라는 사실은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깊숙한 눈, 우뚝 솟은 매부리코 등 전체적인 얼굴 형상이 페르시아풍이다. 이를 흔히 심목고비(深目高鼻)라고 한다. 귀 밑에서 턱으로 흐르는 수염 역시 우리 모습이 아니라 페르시아 모습이다. 무늬를 새긴 천으로 곱슬머리를 동여맨 점, 헐렁한 상의에 치마 같은 하의를 걸친 점, 아랍식의 둥근 터번을 쓰고 있는 점 등 복장까지 영락없는 페르시아 계통이다.

이들은 무시무시하다. 8척이나 되는 키, 육중한 몸집, 가슴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오른손, 칼을 힘차게 움켜쥔 왼손이 역동적이고 무섭다. 신라인들이 왕의 무덤을 지키는 무인석의 모델로 페르시아인들을 채택했던 것은 그들의 무시무시한 풍모가 악귀를 쫓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신라의 관료로 일했던 페르시아인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土俑·흙인형)에서도 페르시아인 등 서역인의 모습이 나타난다. 경주 용강동 석실분(8세기)에서 나온 문관상은 홀(笏)을 들고 서 있는 모습. 긴 턱수염과 얼굴 모습이 페르시아인의 풍모다. 그 분위기는 괘릉을 지키는 페르시아 무인석과 사뭇 다르다. 무시무시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드럽고 편안한 얼굴이다.

홀은 옛 관리들이 왕을 만날 때 손에 쥐는 물건이다. 이 홀을 들고 있다는 것은 1200여년 전 페르시아인들이 그 먼 곳에서부터 경주 땅으로 들어와 신라의 관료로 일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9세기 ‘처용가’의 주인공인 처용도 빼놓을 수 없다. 헌강왕을 따라 경주에 와서 벼슬을 하던 중 어느 날 밤 아내를 범하려는 역신(疫神)에게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그 역신이 물러갔다고 하는, 용의 아들 처용. 처용에 관한 조선시대의 기록 등에는 처용의 얼굴은 매우 이국적이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처용도 페르시아 출신으로 신라 왕실에서 일했던 서역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

페르시아인과 서역인이 신라 왕실의 신하로까지 일했다면 경주 땅에 얼마나 많은 페르시아인과 서역인들이 들어왔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 페르시아인들은 왜 신라에 왔을까

일부에서는 페르시아인과 서역인들이 실제로 경주에 들어온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당시 중국의 당나라에 남아 있는 조각이나 그림 등을 통해 페르시아인과 서역인의 이미지를 접하고 그것을 차용해 무인석과 토용을 만들었다는 견해다. 즉 직접 본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보고 제작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이 실제로 신라에 들어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직접 보지 않고선 이렇게 생동감 넘치고 사실적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페르시아가 이슬람화한 뒤인 9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가 쓴 ‘왕국과 도로 총람’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중국의 맨 끝 맞은편에 산이 많고 왕들이 사는 곳이 있는데 바로 신라다. 신라는 금이 많이 나고 기후와 환경이 좋다. 그래서 많은 이슬람교도(페르시아인 포함)가 신라에 정착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인과 서역인은 신라의 금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실크로드를 거쳐 경주 땅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화려한 신라 금관을 탄생시킨 황금의 나라 신라를 찾아 우수한 금속 공예술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다. 그 페르시아 사람들 중엔 상인도 있었고 용병도 있었다. 그들이 매일 신라의 수도 경주 거리를 활보했고 신라인들은 그 페르시아인을 모델로 삼아 무인상 등을 제작한 것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영상 취재 : 이훈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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