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은 한국 현대시의 역사에서 가장 순도 높은 순수시를 일관되게 쓴 과작(寡作)의 시인이다. 그는 스스로 “나의 직장은 시(詩)”(‘제작’)라고 하였고, 자신은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桶) 길어다준 일밖에 없다”(‘물 桶’)면서 가난한 고백을 이어갔다.
연애시에는 한없이 인색했던 그는 “나의 연인은 내가 살아가는 날짜들”(‘연인’)이라고 했을 뿐인데, 바로 그가 월남하기 전 잠깐 마주쳤던 ‘첫사랑’을 이렇게 시간과 공간의 구체성으로 호명하고 있는 것이다. 비옷을 빌어 입고 다니던 28년 전 개성의 호수돈 고녀(高女), 기억 속의 그곳에서는 아마 지금도 비가 내리고 사랑스러운 트럼펫 멜로디가 환청(幻聽)처럼 들리고 있을 것이다.
한때 개성의 호수돈 고녀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 박완서 선생은 그 학교가 “화강암으로 지어진 아주 아름다운 건물”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이제는 건물만 남아 있다는 그 아름다운 학교를 감싸면서 ‘비’와 ‘첫사랑’과 ‘실연’과 ‘트럼펫 소리’의 기억이, 김종삼의 가장 아름다운 시편의 제목이기도 한 ‘묵화(墨畵)’처럼, 적막하게 번져가고 있다.
유성호 평론가·한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