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영월사람 75명, 그 황토빛 이야기…들풀 같은 사람들

  • 입력 2008년 4월 12일 02시 50분


책 속에 등장하는 강원 영월군 상동읍에 사는 이귀녀 씨의 1960년대 시어머니 회갑 사진. 사진사가 산골 골짜기까지 출사를 와서 찍었다. 사진 제공 눈빛출판사
책 속에 등장하는 강원 영월군 상동읍에 사는 이귀녀 씨의 1960년대 시어머니 회갑 사진. 사진사가 산골 골짜기까지 출사를 와서 찍었다. 사진 제공 눈빛출판사
◇ 들풀 같은 사람들/엄상빈 글 사진/248쪽·2만 원·눈빛출판사

참 답답하다. 모두가 차렷 자세. 일자대형 아니면 45도 어깨 내밀기. 미소도 없고 허리는 어찌 그리 빳빳한지. 신경 써 꺼내 입은 옷이 알록달록 꽃무늬 티셔츠.

하지만 왠지 더 친근하다. 누구나 ‘자연스러운’ 사진을 원하는 시대.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막상 평범한 어른들은 그게 더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모델처럼 자세 잡고 배우마냥 표정 지을 줄 모르는. 저자는 바로 그런 모습을 담았다.

‘들풀 같은 사람들’은 강원 영월 사람들의 삶 이야기다. 45가족 75명의 인터뷰를 엮었다. 사진작가인 저자가 그들의 현재를 40여 장 찍었고, 건네받은 110여 점의 기념사진과 자료사진도 함께 실었다.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낯익다. 고향 마을 어귀에서 마주치는 그 모습 그대로다. 미용실 원장, 농부, 면서기, 광원…. 수십 년의 삶이 빼곡히 녹아든 ‘우리네 어른’들이다.

하지만 그 평범 속에는 지난했던 이 땅의 풍진이 고스란하다. 6·25전쟁에서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할아버지, 열 살에 민며느리로 시집간 할머니, 남편 병수발과 육남매 뒷바라지에 평생을 바친 어머니. 주름 하나 뭉툭한 손마디, 그 자체가 한반도의 역사다.

힘겨웠지만 요즘 세대에겐 신기한 일화도 많다. ‘쥐잡기 운동’ 때 학교에 낼 쥐꼬리가 없어 할미꽃 줄기를 잘라온 아이들. 배고픈 광원들이 화약의 젤라틴을 자꾸 축내자 비상을 섞던 시절. 그들의 차렷 자세엔 봄이면 앞산을 가득 채우던 들풀 향기가 묻어난다. 저자는 그 ‘내음’을 한껏 담아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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