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세상]완성을 꿈꿀 때는 몰랐다 매순간이 꽃봉오리였음을…

  • 입력 2008년 4월 15일 03시 01분


갈 때마다 미술관의 너른 창 너머 펼쳐지는 풍경이야말로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요즘 같은 연둣빛 봄날 풍경은 그 운치가 더하다. 서울 안에 이처럼 자연과 어우러진 미술관이 있다는 것도 행운처럼 느껴진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안의 소마미술관.

여기서 6월 1일까지 열리는 ‘한국 드로잉 백년전: 1870∼1970’은 미술 애호가들의 발걸음을 유혹하는 전시다. 예술작업의 기초 표현인 드로잉을 화두로 삼아 근대 미술사를 일별하면서 소묘나 데생으로 알려진 드로잉에 대한 도전적 시각을 보여주는 기획전이기 때문이다.

이 전시에서는 한국 근현대 미술가 40여 명이 그린 270여 점을 ‘전(前) 근대’ ‘전쟁과 전쟁 속의 삶’ ‘전후 실험’ 등 6개 테마로 나누어 선보인다. 구본웅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박고석 등 대가의 체취가 담긴 작품을 만나는 기쁨도 크지만, 드로잉의 개념을 확장시키는 작품들과 만나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가령 전통적 모필 선의 기능과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조선 후기 불화(佛畵)의 밑그림들이 그러하다. 이는 당시 스님들이 그 자체로 완성된 작품으로 평가하던 것이었다. 더불어 시인 이상이 쓴 ‘오감도’ 한글 초고, 건축가 김수근의 ‘공간’ 사옥 드로잉, 이상범의 동아일보 연재소설 삽화, 종이와 연필의 관습적 틀을 벗어나 다양한 매체를 사용한 작품들은 ‘드로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함께 새로운 이해를 촉구한다.

완성작을 위한 습작이나 파생물로 내려보던 시각을 벗어나, 독립적 작품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가진 드로잉의 깊은 맛을 보여주는 또 다른 전시가 있다. 28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작가 드로잉 특별전-움직임과 소리’전. 백남준 곽훈 조성묵 하동철 강익중 배영환 등 1995∼2007년 비엔날레 한국관에 출품한 작가와 수상작가 16명의 드로잉이 펼쳐진다.

조각가 김인겸의 풍성한 울림을 담은 서정적 드로잉부터 젊은 작가 함진과 문성식의 낙서나 일기장 같은 그림까지 천차만별 드로잉이 전시된다. 맨눈으로 보기 힘들 만큼 작은 오브제 작업을 해온 함진은 스케치북에서 뜯어낸 종이들을 벽에 붙이며 말했다. “엄마가 김밥을 말 때 속 재료가 다 들어간 완성된 김밥도 맛있지만 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 계란과 햄, 당근을 하나씩 집어먹는 것도 똑같이 맛있지 않던가요?”

이들 전시는 현대미술의 흐름이 완성보다 실험과 해석을,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것과 맥락이 닿는다. 드로잉이 주목받는 이유도 ‘과정이자 그 자체로 완성’이라는 양면성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은가. 한눈팔며 해찰하며 흘려버리는 하루하루, 단단히 맞잡은 손을 무심히 놓아버린 순간들. 이런 시간과 만남이 쌓여가며 인생도 한 점 꽃잎처럼 흩어져간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현재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톨스토이의 말을 미처 깨달을 새도 없이.

그러니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성취하고, 원하던 것을 얻은 순간 못지않게, 꿈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의 한 걸음은 다 소중하다. 혹여, 지금이 내 인생의 가장 깊고 험한 골짜기를 건너는 때라 생각 든다면,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시를 소리 내어 중얼거려야 할 순간이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그때 그 일이/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그때 그 사람이/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더 열심히 파고들고/더 열심히 말을 걸고/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더 열심히 사랑할 걸…/반벙어리처럼/귀머거리처럼/보내지는 않았는가,/우두커니처럼…/더 열심히 그 순간을/사랑할 것을…/모든 순간이 다아/꽃봉오리인 것을,/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꽃봉오리인 것을!’(정현종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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