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게오르크 가다머(1900∼2002)는 20세기 독일의 대표적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이 책은 그가 의사들을 상대로 강연한 글을 묶은 것이다. 건강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문제부터 현대과학과 의술, 의사의 권위와 한계 등 의학을 둘러싼 여러 문제에 대한 사색이 담겨 있다.
가다머는 “철학자가 건강의 본질과 관련한 폭넓은 문제 영역을 다루려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의학이 철학자들의 주된 사유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가다머가 제시하는 담론과 해석은 여러모로 흥미를 자아낸다. 102세까지 산 철학자의 글이라는 점에서 건강과 삶, 죽음에 대한 그의 해석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가다머는 우선 과학기술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낸다. 오늘날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는 과학기술적 관점이 도입된다. 과학기술을 통한 대상의 이해는 흔히 ‘객관적 진리’로 포장돼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추상적이고 일면적일 수밖에 없다고 가다머는 지적한다. 과학기술의 하나인 의학 또는 의술 역시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갖고 있다.
현대 의학을 얘기하기 위해 가다머는 질병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질병이란 ‘평형을 유지하다가 불균형 상태로 떨어진 것’을 뜻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가다머에 따르면 의사는 잃어버린 평형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질병을 정복하는 게 아니라 환자의 회복 과정에 동참하는 것일 뿐이다. ‘질병을 정복한다’는 말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간을 자연의 힘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계몽주의자들의 독단 같은 것이라고 가다머는 지적한다.
따라서 의사들은 의학적 한계를 넘어서 그 이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가다머는 “의사는 자신의 의학적 개입이 환자의 질병에 대해서뿐 아니라 환자의 전체 삶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가다머는 의사들의 태도와 역할에 대해 반복해서 주문한다. 그는 특히 오늘날 병원에서 환자가 이름 대신 번호로 구분되는 것처럼 의술의 대상으로 격하되는 것을 비판한다. 환자가 과학기술(의술)의 일반적 지식을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사례’로 다뤄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환자는 사례로서 다뤄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다. 따라서 의사는 과학기술자로서의 역할을 넘어서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해석학적 이해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가다머는 강조한다.
건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도 독특하다. 그는 “건강은 질병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따라서 질병은 건강을 위해 극복하거나 제거돼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역설적이지만 건강한 삶을 위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가다머는 주장한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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