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그렇게 말해 놓고 어느 날은 한없이 쓸쓸해졌을지도 모른다. ‘내 혼자 마음 나같이’ 알 수 없었으니 당신은 갑자기 외로워졌을 것이다. ‘내 혼자 마음 나같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나는 어느 날 당신에게 불현듯 화를 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쓸쓸함을 감추고 그런 서운함을 숨기는 것은 ‘혼자 마음’에 우리가 함께 도달할 수는 결코 없으리라는 그 영원한 불가능성 때문만은 아니다. 나의 혼자 마음을 나처럼 아는(안다고 믿고 또 그렇게 믿어지는) 당신, 당신의 혼자 마음을 당신처럼 아는(안다고 믿고 그렇게 여겨지는) 나를 우리는 사랑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뻔해지지 않았는가. 이건 사랑의 끝이 아닌가.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당신이 안다고? 이번엔 이렇게 우리의 지루한 오해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쓸쓸해질 때, 자꾸 서운해질 때, 아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이라고 탄식할 때, 우리는 그리워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가난한 존재들이다. 그러하니,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이라는 영탄은 사랑의 실패 뒤에 붙여지는 한숨이 아니라 사랑의 실재를 감싸며 휘도는 사랑의 발성이다. 이 사랑의 발성이 ‘간곡한 방울방울’ 같은 영랑의 언어를 통해 둥근 파문처럼 가없이 공명하고 있다.
김행숙 시인·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