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면 100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 높은 천장, 단순하고 고전적 스타일의 창문과 샹들리에, 삐꺼덕 소리가 날 듯한 나무 바닥과 계단. 빨간 벽돌의 고풍스러운 유럽식 건물의 방방마다 고지도부터 근현대 미술까지 한강을 비추어 본 작품들이 자리 잡고 있다. 강을 화두로 삼아 물에 대한 상상력과 사유를 폭넓게 조우하는 자리다.
서울 관악구 남현동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에서 열리고 있는 ‘배를 타고 가다가-한강르네상스, 서울’전. 알찬 전시가 무료이고 대한제국 시절의 서양 건축물(사적 254호)을 둘러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1905년 준공된 옛 벨기에영사관이 도심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서울 중구 회현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져 복원됐는데 우리은행이 서울시에 무상 임대해 미술관으로 사용 중이다.
‘시간의 강을 건너’라는 주제 아래 1층에서 펼쳐진 전시는 이미 사라진 풍경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자극한다. 2층 ‘한강에 누워’에서는 생태와 소통 등 강과 관련된 이슈를 재해석한다. 장르도 다양하다. 이득영의 ‘한강 프로젝트3: Every Building’은 유람선을 타고 가면서 보는 한강을 30m 길이의 사진으로 보여 준다. 물이 담긴 그릇을 한 줄로 배열한 김승영의 ‘물 징검다리’는 수면에 투영되는 형상과의 만남을 통해 관조적 시선을 드러내는 설치 작품. 수종사에서 바라본 절경을 담아낸 김현철의 ‘한강두물머리’는 고요한 물빛을 오롯이 살려낸 산수화다.
‘한 방울 물로 태어나/울퉁불퉁 생의 바닥 기어오는 동안/깜냥대로 잔물결 일으키기도 하고/허무하게 스러지기도 하면서/키운 꽃 몇 송이나 될까/…/합수, 저것은 지우는 경계가 아니라/지워지는 경계 아닌가’(이재무의 ‘양수리’)
순환의 고리로 이어지니, 산골짜기의 물줄기는 모여 강을 이룬다.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팔판동 한벽원갤러리에서 열리는 ‘김문식’전은 강의 시원인 계곡과 폭포로 돌아간다. 전통적 서정이 일렁이는 산수화들은 전시장 밖의 인공폭포 물소리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그는 말한다. “물은 우리 마음의 안식처이자 자연의 순리를 가르친다.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고 높으면 돌아가고 비운 것은 채우고 채우면 또 흐른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물을 세상에서 으뜸가는 선으로 여긴 노자의 사유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그 공을 다투지 않는다. 뭇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도 가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살 때는 물처럼 땅을 좋게 하고, 마음을 쓸 때는 물처럼 그윽함을 좋게 하고, 사람을 사귈 때는 물처럼 어짊을 좋게 하고, 말할 때는 물처럼 믿음을 좋게 하고, 다스릴 때는 물처럼 다스림을 좋게 하고, 일할 때는 물처럼 능함을 좋게 하고, 움직일 때는 물처럼 때를 좋게 하라.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도다.’
모든 물길은 마침내 합쳐져 바다에 이른다. 27일까지 팔판동 진선갤러리에서 열리는 ‘자연 상상’전은 화가의 주관적 시선이 녹아든 근원적 바다의 표정을 보여 준다. 반짝이는 햇살과 잔물결로 몽환적 바다를 담아낸 김동철의 ‘자연-바다’, 일체의 다른 형태나 색채 없이 목탄으로 바다의 실체감을 극대화한 김재남의 ‘풍경은 없다’, 실재와 관념 속 자연을 결합한 문인환의 ‘바다’. 각각의 바다는 정적이면서 역동적인 물의 속성을 펼쳐 보인다.
깊은 산에서 첫걸음을 뗀 뒤 강으로 흘러가 바다로 이어지는 길고도 지난한 여정. 그 길을 통해 지구의 온 생명을 만들고 키우는 물의 마음과 견고한 침묵. 그 속에 분명 우리가 지나쳐 버린 삶의 지혜가 담겨 있으리라.
‘거기 연못 있느냐/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 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은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고개 들어 보라/…이렇게 하루가 오고,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오고, 모든 한살이들이 오고가는 것이거늘, 거기, 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결가부좌 트는 것이 보이느냐’(이문재의 ‘물의 결가부좌’)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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