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의 헤르메스 같은 환상적인 모습으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듀란듀란이 아니었던가. 화려한 꽃일수록 시들어가는 모습이 흉물스러운 것처럼 어떤 밴드보다 근사했던 이들의 처진 얼굴과 주름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공연장에서 열정을 다해 노래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들의 얼굴이 아닌 노래에 열광했다. 무기교가 기교라고 더 이상 짙은 메이크업이나 현란한 의상은 없었다. 오로지 그들의 열정과 깊은 내공에서 나오는 노래 소리만으로 가슴 속이 뜨거워졌다. 배가 살짝 나왔지만 그림이 그려진 셔츠와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디자인했다는 검정 수트를 입었다(사진). 이런 모습을 보며 ‘나이가 들어도 옷은 잘 입어야 해’라는 생각으로 그들의 ‘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멋진 노래 덕분에 잠시 1980년대 학창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 리오(Rio)에서 롤리 팝 사탕이 생각나는 분홍색, 노란색 수트를 입고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요트 위에서 노래하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분홍색 수트에 노란 셔츠, 푸른 바다를 연상시키는 잉크 빛 수트를 입은 사이몬 르 봉과 존 테일러가 올 봄과 여름에 부활하게 됐다. 이번 시즌 남성복컬렉션은 듀란듀란의 1980년대를 그리워하듯 선명하고 밝은 색상이 넘쳐난다. 특히 지중해 같은 ‘잉크 블루’는 이번 여름 떠오르는 색상이다.
봄, 여름 남성복컬렉션에서는 ‘로마의 휴일’이 연상되는 클래식한 수트 스타일과 1980년대 여피 스타일이 선보였다. 클래식한 무드로 회색 수트가 등장하고 화이트 색상이 면, 마, 합성 등의 다양한 소재로 고급스럽게 선보였다. 루이비통이나 랑방 등의 컬렉션에서도 눈부시게 파란 색상의 셔츠는 물론 바지까지 등장하며 시원한 여름을 예고했다.
이렇게 강렬한 색상을 입을 때는 검정색을 입는 것 보다는 회색이나 베이지 색상을 매치시켜주면 부드럽고 세련돼 보일 수 있다. 또 화이트색상을 매치시키면 시각적으로 시원하고 젊게 보인다. 때때로 집안 어른들에게 분홍색이나 보라색 셔츠를 선물한다. 처음에는 어색해하지만 지금은 밝은 색상의 셔츠를 자연스럽게 소화해낸다. 그렇게 밝은 색상의 옷을 입으면 할아버지의 표정도 훨씬 밝아지는 느낌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공연이 끝난 뒤 무대 뒤로 사라져야 하는 쓸쓸함이 아니라 기교 없이도 담백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당당함이 아닐까.
서은영 패션 칼럼니스트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