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레아의 장인, 성서를 인쇄하라”▼
◇구텐베르크의 조선(전 3권)/오세영 지음/각 320쪽 내외·각 9800원·예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사실입니다.”
“이제부터는 꼬레아의 석주원이 활자 공장을 총괄한다.”
구텐베르크를 만난 조선의 사내는 이 일에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대대로 물려받았고 스승 장영실을 통해 전수받은 금속활자 기술을 실현하는 일. 조선을 떠나 먼 이곳 마인츠까지 흘러오게 된 지 4년. 스승 장영실은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갔을까?
이 팩션은 놀라운 상상력으로 우리 자존심을 일깨운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으로서의 자존심.
현존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인쇄물인 고려 ‘직지심체요절’(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간행된 것은 1377년. 독일 구텐베르크의 ‘42행 성경’보다 78년 앞선다.
2005년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선 한국 독일 등의 학자들이 ‘고려 조선의 금속활자가 서양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활자 로드(road)’란 용어도 나왔다. 이것이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 옛날, 이 땅의 금속활자가 어떻게 구텐베르크에게 전해졌을까. 약 3년간의 사료 조사와 구상, 집필 끝에 이 팩션이 탄생했다.
작가는 장영실이 1440년대 초 홀연히 자취를 감춘 점, 교황청 기록에 ‘1452년 신원을 알 수 없는 인물이 쿠자누스 추기경의 소개로 42행 성경을 들고 교황을 알현한 뒤 금속활자의 완성을 인정받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장영실은 은밀히 중국으로 넘어간 것이고 교황을 만난 사람은 조선의 활자장이라는 것이다. 놀랍고도 개연성 있는 상상력. 이 상상력이 시종 독자들을 설레게 한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연쇄살인 뒤에 칸트 ‘순수이성비판’이…▼
◇세상을 삼킨 책/볼프람 플라이쉬하우어 지음·신혜원 옮김/536쪽·1만3000원·랜덤하우스
볼프람 플라이쉬하우어는 이 난해한 철학책을 범죄사건의 중심에 놓는 시도를 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지만 결과는 성공적이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플라이쉬하우어는 유럽에선 인지도 높은 팩션 작가.
1780년 뉘른베르크의 젊은 의사 니콜라이가 알도로프 백작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왼쪽 폐엽에 특이한 부종이 발견된 모습. 계속되는 살인사건의 희생자 중 한 명이다. 사건을 파헤칠수록 기이하게도 출판사와 서점상과 책에 관한 얘기들이 이어진다. 사건에 대한 추리가 이른 곳은 쾨니히스베르크의 무명 교수 칸트가 쓰는 책 ‘순수이성비판’이다.
작가는 현대철학의 역사를 연 이 책이 당시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됐는지를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묘사한다. 귀족들은 칸트의 새로운 생각을 두려워하고 프리메이슨 비밀결사대는 ‘순수이성비판’의 인쇄를 막으려고 온갖 음모를 꾸민다. 미신이 횡행하던 때에 ‘순수이성비판’이 철학과 종교가 분리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상기하면, 책의 위력은 가히 세상을 삼킬 만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정말로 하나의 사상이 세상에 혁명을 가져올 수 있을까. 이성의 빛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새로운 사상의 빛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살인을 통해 그 빛을 가릴 수 있을까. 이는 어쩌면 인류 지성사에 있어 영원하면서도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연결지어 이런 주제를 박진감 넘치게 이끌어나간 작가의 상상력이 읽는 이를 놀라게 한다.
이 개성적인 팩션에 대해 유럽 언론은 “범인은 없고 희생자만 있으며 동기는 없고 단지 생각만이 있다” “철학적 문제에 대해 직접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이야기” “설득적이고 지적인 결론을 지닌 신비한 소설”이라는 평을 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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