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63년 美남북전쟁 챈슬러즈빌 전투

  • 입력 2008년 5월 2일 02시 59분


전쟁의 역사는 주로 승자의 탁월한 전술과 불굴의 정신을 기록한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패자의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 원인이었던 사례도 많다.

미국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5월 버지니아 주의 작은 마을 챈슬러즈빌에서 전투가 벌어져 남군이 승리했다. 절대적인 병력의 열세 속에서도 대담한 측면공격을 감행한 남군 로버트 리 장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하지만 북군의 패장 조지프 후커 장군의 얼빠진 처신이 없었다면 결과는 딴판이었을 것이다.

챈슬러즈빌 전투는 후커가 몇 개월 동안이나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온 승부수였다. 후커의 북군은 병력이 2.5배나 많았고 이미 적정을 샅샅이 파악해 남군을 3면에서 포위한 상황이었다. 남군은 말 그대로 ‘독 안에 든 쥐’였다.

하지만 5월 2일 저녁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면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우선 전장에 처음 도입된 최첨단 전신장비 ‘비어즐리 머신’이 먹통이 됐다. 점과 선(―)으로 이뤄진 모스 부호 대신 알파벳으로 교신할 수 있는 첨단장비가 울퉁불퉁한 길을 마차로 달린 탓에 배열이 흐트러졌으나 수리할 전문 인력이 없었다.

북군에는 공중에서 적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관측기구도 있었지만 이마저 무용지물이 됐다. 300m 높이에 밧줄로 매달아 놓은 기구가 갑작스러운 돌풍에 수평으로 누워버린 탓이었다.

잇단 악재에 후커는 갑자기 암흑 속에 갇힌 듯 당황하기 시작했다. 순간 노도처럼 밀려오는 남군의 함성이 들려왔지만 후커의 두뇌는 이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태였다.

혼란 속에서 사람들이 흔히 내리는 결정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후커는 “진지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참모들은 일제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승산이 있다”며 돌격 명령을 내릴 것을 주장했다.

그 순간, 포탄 한 발이 날아와 후커가 기대 서 있던 현관 기둥에 맞았다. 무너지는 기둥에 머리를 맞은 후커는 충격으로 기절했다. 잠시 뒤 휘청거리며 일어난 후커는 “아직 내가 사령관이야”라고 중얼거렸다.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됐다.

남북전쟁을 전공한 윌리엄 포스첸 박사는 ‘전투에서 지는 법(How to Lose a Battle)’이란 책에서 “당시 후커는 뇌진탕 후 건망증세를 보인 게 분명하다”며 “참모 중 누군가 후커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한 대 갈기고 지휘권을 뺏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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