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주보다 동시다발 장르 각광
클래식 ‘○○○과 친구들’ 바람
인터넷 세대 뷔페식 골라즐기기
오락프로 MC-게스트 섞여 진행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는 것 같군요.”
최근 서울 잠실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펼쳐진 ‘슈퍼주니어’의 콘서트를 자녀와 함께 본 한 클래식 애호가는 놀라워했다. ‘슈퍼주니어’는 13명의 멤버가 함께 무대를 꽉 채운 댄스를 보여주는가 하면 5, 6명씩 소그룹을 이뤄 록 트로트 발라드 힙합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했다. 그는 마치 오케스트라가 수많은 실내악 앙상블로 변신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는 변화무쌍한 장르에 청소년 관객들은 열광했다.
20세기엔 한 사람의 절대적인 카리스마형 지휘자나 연주자, 가수가 무대를 주도했다면 요즘 문화계에서는 세포처럼 끊임없이 분열, 융합하고 아메바처럼 변신하는 아티스트가 각광을 받고 있다. 홀로 무대를 평정하는 솔리스트보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을 모아 앙상블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코디네이터(조정자)형’ 예술인이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다.
○ 유명 솔리스트에서 앙상블 코디네이터로
클래식계에도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전설적인 비르투오소(명인) 연주자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파바로티와 친구들’ ‘아르헤리치와 친구들’ ‘강동석과 친구들’ ‘김정원과 친구들’ 같은 공연에서 보듯 누가 더 좋은 ‘친구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지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스타 피아니스트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도 대표적인 경우. 김 교수는 “나는 백건우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다른 곳에 한눈을 팔지 않고 오로지 평생을 ‘건반 위의 구도자’로 살아온 백 씨와 달리 그는 손열음 김선욱 씨 같은 역량 있는 제자를 길러낸 교육자, 금호체임버소사이어티를 이끌고 있는 실내악 연주자, 수원시향의 상임지휘자까지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나는 언제까지나 음악가로서 주변의 많은 사람과 관계 맺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7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정명훈 씨의 서울시향과 협연하는 ‘피아니스트의 여제(女帝)’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1980년대 이후로 무대에서 솔로 연주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신 그는 세계 곳곳에서 ‘아르헤리치와 친구들’ 공연을 펼쳐왔고,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 임동혁 등 재능 있는 젊은 연주자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대모’ 역할을 해왔다. 무대 위 독주자로서의 화려함을 벗어던진 뒤 더 강력한 ‘여황제’로 군림하고 있다.
서울시향의 악장 데니스 김 씨는 오케스트라와 실내악, 솔로 활동을 활발히 넘나들며 사운드를 빚어낸다.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적 리더십으로 증권사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서울시향 사장의 두 배 연봉을 받고 있다. 그는 “한국의 음악 교육은 전부 솔리스트를 키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난 뒤에 독주자로 남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며 “외롭게 홀로 연주여행 다니는 솔리스트 생활보다 나는 오케스트라 활동이 훨씬 재밌다”고 말했다.
○ 인터넷 시대, 무한대로 변신하라
가요평론가 임진모 씨는 “패티김, 조용필 세대에 비해 요즘엔 솔리스트의 파괴력이 크게 떨어졌다”며 “인터넷 동영상 문화의 영향으로 대중은 한 사람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된 것보다 다양함 속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먹기를 즐긴다”고 말했다.
요즘 TV 오락 프로그램에도 이 같은 경향이 두드러진다. ‘무한도전’ ‘1박2일’ ‘상상플러스’ ‘미녀들의 수다’ ‘우리 결혼했어요’ 등 오락 프로그램은 10명 안팎의 게스트가 누가 MC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조화를 이루며 방송을 진행한다. 이들은 마치 무한 증식하는 아메바처럼 이합집산하면서 앙상블을 창출해 나간다. 유재석 김제동 등 혼자만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어떤 프로그램에서나 잘 어울려 녹아들어가는 코디네이터형 연예인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슈퍼주니어의 경우 13명의 전체 멤버 밑에 ‘유닛(unit)’을 두고 세포 분열해 활동하기도 한다. ‘슈퍼주니어-T’(트로트) ‘슈퍼주니어-KRY’(발라드) ‘슈퍼주니어-M’(중화권 활동 팀) 등이 그것. SM엔터테인먼트 김은아 과장은 “슈퍼주니어는 처음부터 ‘따로 똑같이’ 활동한다는 콘셉트로 활동해왔다”며 “13명 멤버 각각의 멀티 재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 유닛 활동”이라고 말했다.
문화평론가 김종휘 씨는 “현재의 미디어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르가 아니라 캐릭터”라며 “현대의 대중은 모든 것을 빨리 소비시켜버리고 새것을 찾기 때문에 다양한 캐릭터를 여러 가지로 재조합함으로써 늘 새롭게 다가서는 전략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