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5월 12일 0시 1분을 기해 베를린 봉쇄가 해제됐다. 10개월 23일 만이었다.
지리적으로 소련군 점령지역(동독)에 포위돼 있는 베를린 내 미국 영국 프랑스군 점령지역(서베를린)은 소련에는 그야말로 ‘옆구리에 박힌 가시’였다.
소련은 1948년 6월 24일 미국이 서베를린에 자본주의의 혈액인 새 마르크화를 유통시키자 이곳으로 향하는 모든 철도와 도로를 폐쇄했다. 유럽 대륙에 냉전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한 당시 양 진영 간의 전선(戰線)을 명확히 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소련은 외부 공급처를 차단하면 서방 3국이 서베를린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우리는 베를린을 버리지 않는다”며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공수(空輸)작전으로 맞섰다.
사실 무모한 시도였다. 서베를린 시민 200만 명을 먹여 살릴 식량과 연료를 과연 항공기로만 실어 나를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매일 5000t가량을 공수해야 했지만 작전 첫날 공수 물량은 고작 80t이었다.
베를린 시민들은 귀청을 뚫는 C-47 수송기들의 굉음에 ‘또 공습이 시작됐나?’라고 겁을 먹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들이 연명할 식량을 공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조종사들에게 꽃을 선물하기 시작했다. 어린이들도 사탕과 초콜릿을 던져주는 ‘초콜릿 삼촌’을 영웅으로 여겼다.
전 세계에 배치됐던 수송기들이 차출됐고 예비역 조종사까지 투입됐다. 좁은 항공로를 따라 3분 간격으로 수송기 5대가 고도를 달리하며 동시에 이착륙했다. 템펠호프 공항에는 활주로 2개를 새로 만들었다.
1949년 4월 16일 부활절을 맞이해서는 하루 동안 1383회에 걸쳐 1만2941t을 공수했다. 이날의 빅 이벤트는 ‘부활절 퍼레이드’라는 이름으로 기록됐다. 결국 소련은 더는 봉쇄가 의미 없음을 깨닫고 서방 3국과 협상에 들어갔다.
봉쇄는 5월에 해제됐지만 공수작전은 그해 9월 30일 공식적으로 끝났다. 15개월의 공수작전 동안 소련 전투기의 격추 위협과 근접 비행에 따른 충돌, 활주로 불시착 등으로 79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베를린 봉쇄 해제는 이제 막 시작된 동서 간 대립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렇게 베를린에서 시작된 냉전은 베를린에서 끝이 났다. 40년 뒤 장벽이 무너진 뒤에야.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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